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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떠나고 놔줘야 “

2018-10-16 (화) 나 리/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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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체스터 칼럼

오랜 세월을 투자한 일을 그만두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인생에서 가끔은 익숙한 것을 버려야 하고, 때론 떠나고 놔줘야 할 때가 있다.

아들의 태권도, 처음 시작은 우연이었다. 우연히 간 친구 생일파티에서 친구의 도복과 벨트가 멋져 보여 아들은 태권도를 시작했다. 2단이 되기까지 8년을 다녔다. 그 중 5년 정도는 매일 갔다. 눈이 펑펑 내려도 방학에도 시험 기간에도 빠지질 않았다. 새해 떡국 먹고 가고, 크리스마스이브도, 일 년의 마지막 날도 태권도장에서 운동하며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아들의 열심히 하는 모습에 나도 최근 3년을 같이 태권도장에서 운동했다. 내가 힘들 땐 아들이, 아들이 힘들 땐 내가 가자고 그렇게 서로 격려하며 운동을 했다.

그사이 메달도 받고 또 부상도 당했다. 부상과 훈련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 결국 태권도를 잠시 쉬기로 했다. 부상의 위험을 안고 태권도 대회를 가기보단 고등학교 공부에 집중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몇 년을 같이 한 태권도 사범님과 운동한 친구들과 헤어지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도장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내가 간호사가 된 것은 우연이었다. 우연히 간호대학에 지원하려는 친구 이야기를 부모님과 나누다 내가 지원을 했다. 그리고 간호사가 된 나는 유학생인 남편을 만나 한국을 떠나 친척 한 명 없는 미국에서 살게 되었다. 간호사로 한참 일하며 대학원 공부로 바쁜 시기에 내 삶에 힘든 일이 생겼다. 버텨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환자를 돌보는데 자꾸 실수했다. 간호사의 실수는 환자의 생명과 연관된다. 이러다 정말 큰 실수로 환자를 다치게 할까 무서웠다. 결단을 해야 했었다.

동료들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면서 버티라고 했다. 다들 삶에 힘든 순간이 있었다면서 그래도 버텼다고 병원 휴게실에 주저앉아있던 나를 다독였다.

하지만, 더는 동료들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고 내 삶의 고통은 여전했다. 결심했다. 한 학기 반 남은 대학원 공부도 의료보험을 커버해주던 병원 일도 그냥 놨다. 마지막 근무하고 집에 온 날, 나는 와서 쓰레기 봉지를 들고 집안 정리를 시작했다. 병원 다닐 때 입던 스크럽도, 멋 내려 산 하이힐도, 유통기한 한참 지난 화장품들도 냉장고에 있던 시어버린 김치도 다 같이 봉지에 담아 버렸다. 집안 곳곳이 비워지니, 마치 체한 내 속이 뚫린 듯 살 것 같았다.

삶에 빈 곳이 생기면서 동네 이웃들과 만남의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그 이웃들이 자매가 되어 나에게 삶의 끝에서 걸어 나올 힘을 부어줬다.

병원이라는 안정된 직장과 거의 끝나가는 대학원을 그만두는 건 바보 같은 선택이다. 하지만 그 바보 같은 선택으로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이웃사촌을 얻었다. 8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한 운동을 그만두는 것도 어리석어 보인다. 하지만 때론 떠나고 놔줘야 한다. 인생에서 가끔은 익숙한 것을 버려야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음에, 아직도 자신의 태권도 시합 비디오를 보며 자신의 선택에 힘들어하는 아들이 위로받았으면 한다.

<나 리/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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