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에 빠져 있는 할머니

2018-10-06 (토)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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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생명의 탄생.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우주가 제 아무리 크다 해도 생명 하나의 가치보다는 작다. 특히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 그것도 단 한 번. 그 어떤 가치도 인간의 이런 생명에 비교될 수는 없다. 다이아몬드가 수백억 나간다 해도 인간, 생명 하나와는 맞바꿀 수 없다. 생명의 가치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이외의 생명들. 동물이나 곤충. 바다의 고기나 산의 나무나 풀. 이들도 똑같은 생명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인간에게 굴종할 수밖에 없는 슬픈 생명들. 아니 굴종까지도 괜찮다. 인간의 밥이 되어 인간의 배만 불리게 하는 동식물의 생명.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으나 먹이사슬의 세상,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아닐까.

어느 친구는 집이 오래된 아파트라 그런지 바퀴벌레가 나온다고 한다. 바퀴벌레는 어둠을 좋아한다. 집안이 환할 때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어둠이 깔리면 나온다. 밖에서 볼일을 보고 밤에 집에 들어가 불을 켜면 바퀴벌레가 쏜살같이 도망간다. 잽싸게 바퀴벌레를 잡는다. 잡는 것도 바퀴벌레보다 훨씬 빨라야 잡는다.


그리고 잡은 바퀴벌레를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하는 말이 있단다. “미안하다. 내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나라” 이 친구 불교도가 아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한다. 전생과 현생, 그리고 내생. 불교의 교리중 하나다. 해탈(解脫/moksa/nirvana)하지 못한 생명은 윤회를 하게 된다. 해탈은 몸과 마음에서의 자유 또는 해방을 뜻한다.

윤회(輪回/samsara/reincarnation). 죽어서 다른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의미다. 윤회에선 바퀴벌레가 죽어 인간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바퀴벌레가 해탈할리는 만무하니. 아니. 바퀴벌레도 해탈할 수도 있겠다. 인간보다 더 욕심이 없고 순수할테니. 바퀴벌레가 원하는 것. 오직 먹을 거 외에는 무엇이 있겠나. 그러니 순수하지.

친구의 내외가 약 두 달 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됐다. 나이 70에 첫 손녀를 본 거다. 친구는 아들이 없이 두 딸이 있는데 그 중 큰 딸이 시집을 가서 6년 만에 딸을 낳았다. 그러니 이 친구에게는 외손녀가 된다. 외손녀. 그 하나의 새 생명이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과 돈이 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딸은 임신이 안 됐다. 그래서 비싼 한약을 먹고 좋다는 의사를 찾아 다녀보고. 별별 수단방법을 다 쓰다 택한 게 인공수정이었다. 9개월 반 동안 잘 자란 태아는 분만할 날이 가까웠다. 딸은 수술이 아기에게 안 좋다하여 자연분만을 택했다. 병원에 입원하여 자연분만을 시도했으나 48시간이 지나도록 아기는 나오지 않았다.

사흘 째 되는 날. 친정엄마의 권유도 있었고 딸과 사위는 자연분만 시도에 지칠대로 지쳐 수술을 택했다. 건강한 여아가 태어났다. 두 달이 지난 지금. 할머니는 딸의 집에 수시로 드나들며 딸과 아기를 돌본다. 아기를 돌보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할아버지. 그 친구는 말한다. “할머니가 손녀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고.

새 생명의 탄생.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해 준다. 집안에 한 아기가 태어남으로 아빠와 엄마는 물론, 양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더 없이 좋아한다. 그리고 형제자매와 친척과 친구들. 모두 한 생명의 탄생을 축하해주고 잘 자라기를 기원해준다. 한 생명의 탄생은 한 가정, 두 가문에 즐거움을 안겨 준다.

그러나, 한 생명의 탄생이 저주가 되는 땅도 있다. 아프리카 등의 빈곤국 실상이다. 통계에 의하면 1초에 5명의 아기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이들 빈곤국에서는 한 생명의 탄생은 곧 죽음의 저주로 이어진다. 개발도상국의 5세 이하 어린이들의 사망원인은 영양실조다. 친구의 말인즉. 손녀가 미국에서 태어나 감사하단다.

빈곤국에서 탄생해 죽어가는 아이들. 윤회가 있다면, 내생엔 부자나라에서 태어나면 좋겠다. 새 생명의 탄생은 기적이다. 하지만 그 생명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면 그것보다 비극도 없다. 온갖 생명의 탄생. 다 좋아야 할텐데. 손녀와 사랑에 빠져 있는 할머니. 할머니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을 친구의 모습. 괜찮다.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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