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잠시 멈춤

2018-08-03 (금) 고명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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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장만한 여행용 가방에 자주 쓰는 물건을 챙겨 넣었다. 고작 사흘간 집을 떠나는데 챙겨야 할 물건이 한 둘이 아니었다. 내면을 둘러싼 군더더기는 가져갈 곳이 아니어서 여행용 가방엔 비워진 마음이 더 넓게 자리를 차지했다. 이번 여행은 더부살이 세상에 삯으로 얽매인 삶에서 잠시 떨어져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는 행사였다.

나는 3년 만에 '밀알 장애인 선교단' 제26회 사랑의 캠프에 참석하게 되었다. 해마다 열리는 일 년 중 가장 규모가 큰 행사인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합친 600여 명이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위치한 하얏트 호텔에 모였다. 시카고, 뉴욕, 뉴저지, 필라델피아, 워싱턴, 리치몬드, 샬럿, 애틀랜타, 마이애미에서 먼 길 마다치 않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미국의 동부지역에서 열리는 행사인 만큼 멀리 한국이나 유럽 등 다른 나라에서 섬기는 밀알들을 만나보지 못하는 아쉬움도 컸다.

호텔은 온통 빨간색 유니폼으로 통일되어 너나 할 것 없이 활짝 핀 꽃송이가 되었다. 일 년에 한번 있는 이 행사를 고대하며 새 달력이 나오자마자 앞장을 다 뜯어 버리고 캠프가 들어 있는 7월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지적 장애를 가진 한 학생의 이야기에 모두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일 년을 기다렸으니 얼마나 즐겁고 신나는 잔치가 벌어질지 기대도 컷을 것이다. 39년 전 한국에서 밀알이 태동할 때 그 자리에 있었다는 뿌듯함보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가고 있는 밀알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우리는 선교단에 속한 모든 일원을 ‘밀알’ 이라고 부른다. 아무리 많은 단원이 모여도 각자가 한 알의 밀알이 되지 않으면 그 뜻을 이룰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밀알은 처음 창립할 때의 목적인 심신장애인들에게 선교, 봉사, 계몽하는 사역이다. 한국에서 시작해서 전세계의 장애인들을 향한 비전을 품었던 한 알의 밀알은 셈할 수 없는 열매로 여물어 가고 있다. 아동의 ‘사랑캠프’ 는 김은예 강사님이 섬겨 주었고, 성인의 ‘믿음캠프'는 한국에서 날아온 유영기 목사님이 섬겨주셨다. 꽉 채운 프로그램이 빈틈없이 진행 되었고 매시간 눈물과 감사와 기쁨이 습한 체온 속으로 뜨겁게 스며들었다.

한여름의 폭염 속에서도 장애인과 꼭 붙어서 밤낮을 함께 섬기는 학생들이 지상에서 볼 수 있는 천사들 같았다. 현시대는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은 물론 자신조차 돌아보지 못하게 하는 불치의 장애를 안겼다. 말이 어눌하고 팔다리가 자유롭지 못하거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장애인보다 육신 말짱한 사람이 더 심각한 수준인 경우가 많다.

나부터도 장애를 가진 이들이 갖지 못한 것을 다 갖고도 모자라는 것만 채우기에 급급하며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셈이다. 쉼 없이 내달리는 분주한 생활일수록 잠시 멈춤이 절실하다. 차분한 마음의 눈을 가질 때 비로소 나를 옭아매는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나 자신의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다.
마음을 낮추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다 보면 여태껏 보지 못한 것들을 볼 수 있다.

멈출 수 없는 일상을 뒤로하고 밀알 캠프에 참가한 며칠은 올여름 나에게 잠시 멈춤이 되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내 삶의 에너지 충전과 성찰의 기회가 되었던 큰 행사를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미주 밀알총단과 스텝들 그리고 강사님들께 감사를 드려야겠다

<고명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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