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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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그 빛에 스미다

2018-07-27 (금) 최동선/커네티컷 전 한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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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여름은 절정을 향해 가고 있다. 하늘과 햇빛, 그 아래 숲과 사람들이 저마다의 몸짓으로 계절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스스로 풍경이 되었다. 살다보면 아무런 연고도 없고 특별하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마음과 시선이 이끌리는 동네가 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무작정 나선 외출에서도 늘 종착지가 되어 주던 그 바닷가 마을이 그러했다.

오래 전 보스턴을 다녀오던 길에 우연히 들렸던 작은 마을이었다. 이백여 년 전의 초기 이민자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였는지, 지나가는 낯선 이방인에게 조차 넉넉한 품을 내어 줄듯 한 아늑함이 느껴졌었다.

아내와 내가 이곳을 특별히 좋아하게 된 이유를 정확히 설명 할 수는 없지만,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마주한 이곳의 정지된 시간은 늘 숨을 고르는 순간처럼 편안함을 주었던 것 같다.


폭염이 지나간 휴일 아침, 우리는 카메라를 하나씩 나누어 들고 길을 나섰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마을은 포구 깊숙이 파고 든 바닷물과 작은 지류가 만나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뉘었고, 그 두 마을은 다시 다리로 이어지며 하나가 되었다. 다리를 열어 크고 작은 배들이 지나가는 뱃길을 만들고 다시 닫아 그 위로 차가 오고 가는 길을 만든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과, 자동차와, 배들이 번갈아 가며 묵묵히 기다림의 의식을 치르는 것을 보는 것도 제법 흥미로운 일이었다.

커피 냄새, 빵 굽는 냄새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길가에 늘어 선 작은 가게들의 전혀 새롭지 않은 소품들은 그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다리 밑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채 무심하게 앉아 있는 늙은 사내들이 있고 그 곁에는 주인을 따라온 강아지들이 배를 깔고 누워서 졸고 있다.

각자가 사는 삶의 거리에서는 바쁘다는 이유로 전혀 눈길조차 주지 않던 풍경들이 7월의 햇빛을 받으며 빛나고 있었고, 그 거리를 오고 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그 빛이 스며들었다. 우리도 그들처럼 거리를 걸었다. 유난히 사람이 많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줄을 서고, 긴 기다림 끝에 받아 든 아이스크림을 어린아이처럼 길 가에 쪼그리고 앉아 천천히 먹었다.

갑자기 경보음이 울리며 다시 다리 위로 차단기가 내려지고, 거리의 모든 사람들은 바닷길을 사이에 두고 다시 아래, 윗마을로 나뉘어 마주 보고 서서 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왁자지껄 떠들던 사람들이 기다림 속에서 하나가 되어 가고 , 그 시간은 사람과 사람 속에 스며들어 정지 되었다. 약속되지 않았으나 약속 된 듯한 침묵의 시간은 언어가 필요없는 한편의 무성영화 같았다.

한눈에 훤히 보이는 거리를 몇 번씩이나 되짚어 오가는 발걸음은 새로움을 찾아 가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발견하는 편안함이었다.

열린 문틈으로 짙은 커피 향이 새어 나오고, 느릿느릿 걷는 사람들 사이로 눈치껏 발걸음을 맞추며 걷다 보면, ‘봉숭아 연정’ 이나 ‘친구여’ 같은 노래가 흘러나오던 익숙한 고향의 동네 풍경이 오버랩 된다. 연고도 없고 특별하지 않은 장소일 지라도 마음 두는 곳이 고향이라는 것을 새삼 알겠다. 상기된 얼굴 위로 땀인지 뭔지가 범벅이 되기도 하고 마음 안에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른다.

여름이 가고, 언젠가 우리는 다시 이 조촐한 바닷가에 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시름 놓은 채로 가을 같은 차 한 잔 할 것이다. 늘 마음에 둔 곳이니.

<최동선/커네티컷 전 한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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