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할빠들의 손주 사랑!”

2018-07-24 (화) 연창흠 논설위원
크게 작게
손자, 손녀, 손주.
손자, 손녀는 자신의 아들, 딸의 아들, 딸이다. 손자는 아들의 아들이다. 손녀는 아들의 딸이다. 딸의 아들, 딸도 손자, 손녀다. 외손자, 외손녀라 부를 뿐이다. 손주는 손자와 손녀를 통칭하는 말이다. 손자, 손녀와 손주는 의미가 다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손자, 손주를 구별해 쓰지 않는다. 틀린 표현이다. 흔히 말하는 “손주며느리”도 “손자며느리”가 바른말이다.

‘할마와 할빠’.
할마는 할머니와 엄마를 조합한 합성어. 할빠는 할아버지와 아빠를 조합한 신조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맞벌이 자녀를 위해 손주를 돌보는 경우가 늘면서 나온 말이다. 한인사회에도 할마, 할빠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언제부턴가 그토록 사람 좋아하던 지인이 귀가 시간을 서두른다. 술자리를 주도했던 친구도 1차면 끝이다. 사람이 변했다는 소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나중에야 ‘손주사랑’ 때문에 생활패턴이 바뀜을 알 수 있었다. 요즘 무한 손주 사랑에 빠진 이들이 부쩍 늘었다.


이들은 ‘자식 사랑보다 더한 것이 손주 사랑’이라 말한다. 자식 키울 때 못 느꼈던 행복을 손주를 통해 느끼고 있다고 한다. 젊어서 자녀를 기를 때 느끼지 못한 사랑을 이제 자녀의 자녀를 돌보며 깨닫고 있는 것이다.

자녀에게 엄할수록 손주 사랑은 더 한 것 같다. 손주 귀여워하면 할아버지 수염을 잡아당긴다는 말이 있다. 어찌 보면 엄한 할아버지의 수염을 잡아당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손주인 셈이다. 주변에서 자녀를 엄하게 기른 지인일수록 더욱 손주들에 대한 자애로움이 도드라짐을 느낄 수 있다.

좀처럼 웃음이 없던 지인이 손주 앞에서 그렇게 인자한 모습을 보일 때는 참으로 놀랍다. 권위도 없고 그저 웃는 모습을 보일 땐 손주 사랑이 듬뿍 묻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손주 없는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무한 손수 사랑인가 보다.

이들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존재가 손주다.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깨물어도 아프지 않는 손가락이다. 맑은 눈동자와 해맑은 웃음은 피로를 사라지게 한다. 무럭무럭 자라니 신기하고 대견하다. 고맙기 그지없다. 전혀 새로운 기쁨이요 기대다. 집안의 자랑이자 보람이다. 항상 ‘좋은 할아버지’가 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다.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보살펴 주는 이유다.

손주 사랑이 곧 행복한 가정의 지름길이라 여긴다. 심지어 자식, 며느리, 사위 등을 미워해도 그들이 낳은 손주는 끔찍하게 아끼는 경우도 한 둘이 아니다.

조선시대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는 싫어하여 비극적인 파국을 맞았지만, 손자인 정조를 매우 아낀 것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한인사회엔 ‘손주 바보’가 수두룩하다. 손주 없는 사람은 인생을 논 할 자격이 없다고 큰소리치는 이들이다.

‘할마와 할빠’들은 삶의 만족도가 높다고 한다. 치매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의미다. 손주를 돌보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감정들이 정신건강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학교 성적이 좋았다. 성인이 된 후의 성취도도 높았다. 자식의 자식 농사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향한 아이들의 변심이다. 어릴 때와는 달리 자라면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예전 그대로인데 손주들은 아쉬울 때만 찾고 있으니 속상하고 섭섭한 마음은 당연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손주들의 변함없는 마음은 부모하기 나름이다. 지금 부모를 대하는 나의 모습이 결국 우리 아이들의 미래인 것을 명심해야 하는 이유다.

<연창흠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