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역사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2018-07-21 (토) 김동찬 시민참여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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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되어 존재하던 인간 집단들을 최초로 세계화 인류화한 인물로 대부분의 학자들과 언론들은 징기스칸을 꼽는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자에게는 무자비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항복하거나 협력하는 자에게는 기존의 자기 지지세력과 늘 동등하게 대우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세운 제국의 영토 안에서 철저히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사실 종교의 자유는 19세기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나온 것으로 알지만 징기스칸은 이보다 700년이나 앞서서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뿐만 아니라 인종간의 평등을 통한 화합을 강조했다.

몽골군이 헝가리와 폴란드를 공격하자, 교황 그레고리 9세는 유럽연합군을 보내서 막았지만 몽골군에게 전멸을 당한다. 그런데 몽골군은 유럽에 엄청난 공포만 남기고 사라진다. 이에 사로잡힌 영국출신의 몽골군 장교를 심문하면서 몽골제국이 궁금했고 프란체스코 수도사 기몽 루브룩이 몽골제국을 염탐하기 위해 1254년 당시 몽골의 수도 카로코룸을 방문했다.


거기서 그는 당시 유럽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한다. 바로 종교의 자유다. 성안에는 불교 사원 12개 이슬람 사원 2개 교회당 1개가 있었다. 인종적으로도 페르시안 무슬림, 위구르 무슬림, 중국인 그리고 몽골 귀족관리들이 각각 4개의 성문을 중심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민족들이 성안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몽골제국은 종교의 자유와 인종과 민족간의 평등 그리고 통상을 통해서 전세계와 소통하고 획득한 정보를 분석하고 제국의 정책과 노선을 만들었다. 몽골의 이런 정책은 징기스칸의 성장 배경이 큰 영향을 미쳤다.

징기스칸은 어릴 적 부족으로 부터 버림받았고 가장 믿었던 아버지의 친구와 자신의 친구의 공격에서 마지막까지 도망을 쳐서 발주나 호수에서 숨을 돌려보니 친인척은 없고 모두 출신 민족과 배경이 다른 결사대 20명이었다. 이때 충성의 결의를 다지고 징기스칸은 친인척과 씨족 중심이 아닌 신의와 결의를 중요시 여기고 능력에 따른 지휘계통을 세운다. 결국 징기스칸이라는 정복자는 삶의 환경이 가져다주는 고난을 극복하면서 탄생한 것이다.

전쟁에서는 무자비 했지만 자신의 제국 안에서는 자비로웠다. 그리고 서로 다른 종교와 민족 그리고 인종간의 화합을 통한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힘으로 제국을 건설했고 통상을 통하여 전세계를 연결하여 문화와 경제의 교류를 활성화 시켜냈다. 특히 그는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들판을 달리는 자는 흥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한 국가가 흥하는 기본이 자신과 다른 문명과의 교류와 교역이다. 그리고 내부적으로 서로 다름의 차이를 가지고 차별하여 불만을 쌓지 않았다. 그들은 늘 외부인들을 반겼고 그들로 부터 배우려고 했고 그들의 지혜화 힘을 기꺼이 받아서 자신들의 사회를 더욱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만들었다.

지금 21세기 세계는 기후 변화와 전쟁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많은 나라들이 장벽을 치고 난민들이 자국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먹고 살기 힘든데 난민들이 들이닥치면 경제는 더욱 어려워 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바로 이런 난민들이 세우고 건설했다. 그들 모두 종교와 정치적인 박해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미국으로의 이민을 택했다. 그런 미국이 지금 방향을 돌리고 있다. 미국 건국 242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새로운 미국을 만들기 위함인지, 특정 인종의 미국으로 스스로를 축소하기 위함인지 우리는 소수계이면서 이민자의 조건에서 이 변화의 한가운데 서 있다.

<김동찬 시민참여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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