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침묵의 소리

2018-07-20 (금) 김갑헌/ 맨체스터대 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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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소리’라는 말이 하루종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듣고 싶은 님의 목소리를 오래 듣지 못하기 때문일까? 내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르고 임종하신 어머님의 목소리가 그립기 때문일까?

소리 없는 상태를 침묵이라고 하는데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 일까? 오래 전 폴 사이먼(Paul Simon)이 썼던 노래 가사에 Sound of Silence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듣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떨리는 공기의 진동을 느끼는 것 인데, 침묵의 소리는 그런 물리적인 한계를 벗어난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도대체 이 말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 일까?

사유와 사색의 심연에서 얻는 지혜와 지식을 ‘침묵의 소리’라고 하는 것일까? 깊은 참선의 경지를 말함 인가? 아니면 기도의 깊은 적막함 속에 듣는 영혼의 떨림을 말함 인가? 우주의 저편에 일어난다는 거대한 폭발들은 소리를 동반 하는 것일까 아니면 침묵의 절대 적막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현상일까?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구약성서 시편 19편에 다윗은 절대 침묵 속에서 이루어 지는 우주의 거대한 질서와 신비로운 운행을 노래하고 있다. 아마도 이 시편에서 ‘침묵의 소리’라는 말이 유래된 듯 하다.

과연‘ ‘침묵의 소리’는 들을 수 있는 것 일까? 듣는다는 말의 개념을 바꾸지 않는 한 이것은 불가능한 모순으로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이든이 작곡한 천지창조의 주제는 침묵의 소리였다. 18세기 영국의 시인이며 정치가 였던 에디슨 (Joseph Addition)이 쓴 시, “저 높고 푸른 하늘 (The Spacious Firmament on High)”은 기독교인들이 하이든의 곡에 맞추어 즐겨 부르는 찬송가인데, 에디슨은 이 시 속에서 ‘침묵의 소리’를 이성의 귀 (In Reason’s ear)로 밝게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성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계몽주의 시대의 정신을 보여주는 느낌이 든다. 과학과 논리가 이성의 산물이라면 과학과 논증으로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결국 지식을 통해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인데…, 과연 그런 것인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식과 이해를 말하는 것일까?

지식은 우리의 오관(五官)과 관련이 있다. 서양인들의 철학적 전통은 오관의 경험과 이성의 결실이 바로 지식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포괄적인 동양인들의 관점에서는 보면 예수께서 말하는 믿음이나 부처께서 말하는 초월적인 경험은 논리적 사고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침묵의 소리’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지식과 이해의 울타리를 넘어서기 원하는 사람들, 이를 위해 묵상하고 수행을 하는 소수에게 이 침묵의 소리는 맑고 명쾌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장엄한 침묵 속에 잠겨 있는 무궁한 소리들이 바로 존재의 근원이요, 그 막막한 침묵을 모두 들을 수 있는 떨림의 소리로 노래한 것이 다윗의 시편과 하이든의 천지창조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침묵의 소리를 듣는 귀를 가진 사람들 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 그리운 님의 목소리, 돌아가신 어머님의 목소리가 더 깊은 침묵의 소리로 나의 귀를 채우고 있는 느낌이다. 아직도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의 비감일 것이다.

<김갑헌/ 맨체스터대 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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