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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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는 것도 괜찮다’

2018-07-20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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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1세들은 제1의 고향은 한국 땅에 있고 이민 와 사는 이곳 뉴욕은 제2의 고향이라고들 한다. 사는 곳에 정 붙이기 위해서, 자녀들이 뿌리내려 살 곳이므로 살갑게 뉴욕을 고향 땅으로 믿는 것이다.

한국에서 직장인, 전업주부로 산 것이 제1의 삶이었다면 한국에서의 직업을 모두 잊고 이민 와서 세탁소를 비롯한 요식업, 델리 등의 자영업자나 콜택시 운전사, 부동산 중개인 등 전혀 다른 직종으로 생활한다면 이는 제2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제3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수십 년 동안 집이 되고 자녀들의 학자금이 되던 비즈니스를 팔거나 물려주고 전혀 상반된 전업을 하거나 보람 있는 일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주위에 65세 메디케어를 받으면서 현역에서 은퇴 하는 시니어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제3의 삶을 찾아가는 이들은 부와 물질을 따라가지 않는 점이다. 보람과 희망을 쫒아서 혹은 평생 먹고 사느라고 못해 본 것을 다리에 힘이 빠지기 전에, 죽기 전에 해보고 싶다고 한다.

프린스턴 지역에 사는 친척 오빠는 한국에서 영어교사를 했는데 이민 와서 세탁소를 열었다. 두 아들 결혼시키고 손자손녀도 태어나자 잘되던 세탁소를 팔려고 내놓았고 프린스턴의 크고 넓은 집도 팔았고 화려하고 우아한 가구들도 모두 중고가게를 통해 팔아치웠다.

그리고 투 룸의 작은 아파트를 구입하여 클로징을 앞둔 한 달 전 뉴욕을 떠났다. 현재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다. 오빠는 카톡으로 시골 풍경, 숲길, 초원, 지평선 사진을 보내주고 시골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도 들려준다. 순례자들 모습을 보면서 ‘내가 걷고 싶은 길인데..’하며 부러워하고 있는 중이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는 스페인을 가로지르는 약 800Km 순례길로 여러 루트가 있다. 프랑스 남쪽에서 시작하는 대표적인 루트는 한달이 걸린다. 산티아고는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 우리말로 야고보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는 산티아고 성당에 묻혀 스페인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9세기부터 산티아고 성지 순례가 이뤄졌다.

현재 전 세계에서 자기 성찰을 위한 순례자들이 1년에 20만명이 몰려들고 있다. 순례자 10명 중 한두 명은 한국인이라 한다. 제주도 올레길도 2006년 이 길을 걸은 서명숙씨가 고향에 만들었다.

뉴욕한인사회에도 제3의 삶을 보람 있게 사는 분들이 많다. 뉴욕실버선교회를 통해 과테말라, 멕시코, 터키, 미얀마, 캄보디아, 케냐, 에콰도르 등지에 장기선교사로 나간 이들이다. 2004년 뉴욕 실버선교회가 창립된 이래 단기선교에 참여한 실버 인원들만 700명이라 한다.

‘가자, 세계가 부른다. 부르심에는 은퇴가 없다. 사명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다’는 솔직하고 소박한 실버선교회의 슬로건이 사람의 마음을 잡아끈다.


5년 후, 한국으로 가서 한 달간 템플 스테이(Temple Stay)를 하겠다는 은퇴계획을 밝히는 이도 있다. 푸른 자연 속, 유서 깊은 산사에서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나를 위로하겠다는 이는 풍경소리, 목탁소리, 종소리, 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고 싶다고 한다.
2002년 한인월드컵 기간동안 한국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시작된 템플 스테이는 현재 200만 명의 외국인이 다녀갔다.

어쩌면 생업과 자녀양육으로부터 손을 놓은 이 제3의 삶이 20년, 30년으로 상당히 길어질 지도 모른다. 고령화 사회가 아닌가.

생활수단이던 수십년 간의 중노동에서 벗어나 이제야 부담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제3의 삶을 사는 이들, 이들은 한결같이 “늙는 것도 괜찮다”고 말한다.

노후에 재정과 의료비 걱정이 좀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나이, 지난 삶을 정리하는 시간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다고 한다. 평생을 ‘빨리 빨리’로 살아온 한인들에게 ‘느림의 미학’을 만끽하는 나이, 인생의 깊이를 통찰하는 나이, 썩 나쁠 것도 없겠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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