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떤 결심

2018-07-06 (금)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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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눅한 날씨 탓인지 커피 맛도 미적지근하다. 커피에 얼음을 더 넣으려던 생각 대신 창문을 활짝 열어 젖힌다. 비 그친지가 오래 되지 않았는데 그새 달궈진 지열에 오뉴월 햇살이 더해졌는지 멀리 강 건너 온 바람이 시원하지가 않다. 얼음을 다 녹여낸 커피잔 옆의 유리컵은 무슨 설움이 있는지 눈물방울을 송골송골 매달았다.

무슨 일 하나 똑 부러지게 일궈내지 못하고 일 년의 절반을 뒤돌아볼 틈 없이 보내고 나니 초조해지는 것은 마음이다. 내 삶의 모습이나 동선을 가장 가까이서 엿보았을 집 주변을 둘러 보기 위해 현관의 신발장 문을 열었다. 한 가닥 가죽끈으로 내 몸을 끌고 다니던 샌들도 더위에 지친 기색이다. 지난번 강한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던 곳을 벗어나니 나는 어느새 산 그림자 드리운 비탈길에 기댄 나래 꺾인 한 마리 새가 되어 있다.

지난 일을 후회하는 것은 가장 큰 시간 낭비라고 한다. 내려놓을 줄 모르고 부둥켜안고 있어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한다. 가진 것을 나눌 줄 모르고 욕심부리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다. 눈앞에 안개 섬이 아물거릴 지경에 이르러서야 세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이루겠다고 양지를 골라 달려온 노정에서 잠시 뒤돌아본다. 빛의 위치에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는 빛이 없으면 흔적 없이 사라진다.


꿈을 지고 걸으며 앞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피하려고 뒤돌아서는 순간 그림자도 사라지고 품었던 꿈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빛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림자가 존재하듯이 삶의 여정에는 항상 어둠이 공존한다. 그러한 이치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으니 날이 차고 해가 기울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보다. 마음에 짙게 새겨진 그림자도 빛으로 승화시켜 향기로 우려내야 할 내리막길의 중턱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른다.

늦은 오후 나타난 우체부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오늘은 집집마다 무슨 사연이 배달되었을까 궁금하다. 햇살 좋은 날이나 눈보라가 휘몰아 치는 날에도 우체통의 빨간 깃발을 뒤로하고 내달리는 꼬마 자동차가 미덥고 반갑다.

인터넷의 발 빠른 안방 공략으로 희소식은 뜸하고 반갑지 않은 고지서만 날아들지만, 여전히 기다림의 대명사인 우체부 아저씨다. 누군가에게 변함없이 찾아가는 메신저가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해거름 나이에 내면의 방을 찾아 자신을 수시로 점검하는 일은 하루도 걸러서는 안될 일이다.

초록의 정점을 찍으며 태양과 맞서는 나무들도 졸고 있는 한여름 오후가 시나브로 야위어 간다. 연착륙 없이 씩씩하게 돌아가는 시간은 약속이라도 하듯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왔다. 갈수록 침침해지는 눈과 시린 이와는 더 친해져야 하고 가끔 욱신거리는 발목은 더 아껴주어야 한다. 시간은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마음 깊숙이 아픔도 안겨 준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새날을 열고 다시 해넘이를 할 것이다.

현관문을 나서면서 거실에 그냥 두었던 커피잔 옆의 유리컵에 맺혔던 눈물방울도 모두 흘러내렸다.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결심을 굳히는 일도 커피 하잔 마시는데 드는 시간을 넘기지 못한 것인가 보다. 지나간 일에 마음을 두는 것을 큰 시간 낭비라고 했지만,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는 것은 결국 마음을 다지는 일이 될 것이다. 나의 결심이 빨리 식을까 봐 두렵다. 수시로 찾아드는 나태함을 합리화시키는 안이함은 더 두렵게 다가온다. 말갛게 갠 하늘에 나의 축축한 마음의 빨래를 널며 마음을 다그쳐 본다.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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