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전쟁과 음식

2018-06-22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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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절을 방문, 공양간으로 갔는데 ‘사찰에서는 음식을 남기면 안됩니다’는 글귀가 음식물 옆에 붙어있었다. “참 좋은 말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지금 우리는 풍성한 음식물 천지 속에 살고 있다. 한국식당에서 손님이 주문하여 먹다 남긴 음식은 갖고 올 수 있지만 반찬은 못 가져가게 한다. 집에서 잘못 보관하여 먹다 탈나면 식당 책임 운운할 까 싶어 그럴 것이다. 어차피 모두 쓰레기통으로 갈 텐데 아깝다.

6.25 전쟁 기념일이 다가오지만 우리는 그때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주먹밥, 감자, 보리개떡, 미군부대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섞어 끊인 꿀꿀이죽, 햄이나 소시지에 고추장 넣어 끓인 부대찌게를 먹었다.


또 원래 궁중 떡볶이는 귀한 음식으로 고추장을 넣지 않았다. 6.25 당시 싼 값에 여러 명이 먹도록 누군가 고추장을 풀어 넣은 떡볶이를 만들어 팔았다. 이후 어묵과 라면이 추가된 것이 오늘의 떡볶이다.

전쟁 후 평안도 실향민들이 장충동 일대에 몰려 살았다. 추운 겨울이면 고향에서 꾸덕꾸덕 말린 돼지고기를 즐겨먹던 이들이 생계유지로 족발을 만들어 팔았다. 그래서 장충동에는 평남 할머니집 족발, 평남 원조족발이라는 간판이 많다.

전쟁이 시작되면 모든 생산보급이 어려워지니 굶주려 죽는 사람이 많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레닌그라드 지역을 1941년 9월부터 1944년 1월까지 29개월간 봉쇄했다. 외부와의 모든 통로가 차단 된 레닌그라드의 300만여명 시민 중 반이 죽었다. 굶주린 시민들은 길을 가다가도 픽픽 쓰러져 죽었다. ‘봉쇄 메뉴’라는 것이 가죽 띠나 신발 같은 것을 끓여서 만든 국에 아교죽, 겨자가루 팬케이크, 고양이와 개는 진작에 씨가 말랐고, 참새와 까치도 남아난 게 없고 집쥐, 시궁쥐까지 잡아먹었다.

또 다른 제 2차세계대전 기록에는 이런 문구도 있다.
“ 얼마나 먹을 게 없는지, 개구리고 쥐고 남아나는 게 없다는 거야, 사람들이 다 먹어버려서, 우크라이나의 그 아이는 마구간에서 말똥을 훔쳐 먹고 살아났대. ‘ 말똥이 따뜻할 때는 먹기 힘든데 차가워지면 먹을 만 해. 꽁 꽁 언 게 제일 먹기 나아, 얼면 건초 냄새가 나거든.’ ”

전쟁은 이렇게 살벌하다.
일제가 동양척식회사를 통해 토지를 빼앗아가고 수확한 쌀을 일본으로, 대동아 전쟁터 군미로 다 내갈 때 굶주린 조선인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풀뿌리, 소나무 껍질을 벗겨 씹어 먹었고 온 전국의 산마다 소나무들 껍질이 하얗게 벗겨진 참상을 빚었다. 오래 굶어서 살가죽이 누렇게 부어오르는 부황을 앓기도 했다.

전쟁당시 일제는 군인 보급용으로 건빵을 만들었는데 별사탕을 넣어 단맛을 주었다. 미숫가루는 조선시대 군인들이 비상식량으로 먹었는데 이 미숫가루가 몽고에 전파되어 미스가라가 되었다. 또 통조림은 나폴레옹이 전쟁 중에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음식을 만들라고 해서 나온 것이고 설탕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으로 아랍에서 서방에 전해졌다고 한다.

6.25 전쟁이 끝난 60년에도 어머니들은 여전히 쌀 한 됫박, 보리쌀 한 자루를 꾸러 다니곤 했다. 보릿고개에는 종자까지 먹어 다음 농사를 못 짓는 굶주림의 역사는 이어졌다. 믿기 어렵게도 우리가 하루 세 끼를 제대로 챙겨먹은 것이 70년대 들어서이다.

미국에는 그로서리마다 온갖 식품들이 천정높이 가득 쟁여있다. 당연히 음식 쓰레기도 넘쳐난다. 음식 쓰레기는 염분이 많아 땅에 매장 못한다. 그러니 말려서 소각하거나 동물사료나 퇴비로 재활용 하는데 비용이 많이 든다. 지금도 세계 식량기구를 통해 들려오는 소식은 전세계 1억명의 어린이들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맨다고 한다.

불량식품이 아닌 한, 사람이 먹는 것에는 천한 것이 없다. 모두가 귀하다.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기 때문이다. 소박한 밥상, ‘먹을 만큼 ’을 미덕으로 삼아야 한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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