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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망이 녹아내렸어요”

2018-06-15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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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역사상 최초의 북미회담이 열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화려한 성조기와 인공기가 6개씩 나란히 엇갈려 꽂힌 배경 앞에서 처음 만나 악수를 나누었다. 보고 또 보아도 낯설지만 새롭다.

춘추시대 오나라 손무가 쓴 ‘손자(孫子) 에 나오는 ’오월동주(吳越同舟)‘ 라고나 할까.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다, 이는 아무리 원수지간이라도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같은 배를 탄다는 것, 이는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미국의 야당과 주류언론은 4개항 합의문 안에 구체적인 비핵화 내용과 시간이 없고 한미연합 군사훈련 중지 양보만 했다고 혹평하고 있다. 그래도 더 이상 지구상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가 되고 싶지 않은 한국민 및 재외한인들은 조만간 6.25전쟁 종전 선언도 기대하고 있다.


1953년 7월27일 연합군, 북한군, 중공군 사이에 맺은 정전협정을 종전선언으로 변경하자면 서명 당사자인 미국, 중국, 북한, 실제 당사자인 한국이 함께 참여해야 한다. 혹 정전협정 65주년이 되는 7월27일을 기대해도 되려나?

사실 휴전기간이 너무 오래 되었다. 1,000만 이산가족의 한과 눈물도 말라 버렸다. 뭐든지 너무 오래 묵으면 썩기 마련이다. 넘치면 퍼내야 하고 매듭을 지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숨통이 트이고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1950년 6.25의 기억을 잊어서는 안되고 없었던 일이 되어서도 안된다.

지난 5월 출간된 전기작가 이충렬 지음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산처럼)에 6.25관련 글이 자주 나온다. 아동문학가 권정생(1937~2007)은 평생 병고와 가난 속에 살면서도 ‘강아지똥’, ‘무명저고리와 어머니’, ‘몽실언니’ 등 슬프지만 따뜻하고도 건강한 글들을 남겼다.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에 나온 내용을 인용한다.

“수많은 탱크와 비행기가 온 나라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싸운 전쟁, 형과 아우가 총칼을 맞대고 싸운 전쟁이라 해도 되겠지요, 그것도 스스로가 옳고 그른 것을 가리기 위해 다투게 된 전쟁도 아닙니다. 힘이 센 나라들이 만만하고 어리석은 한국이란 나라에서 자기네들의 이득을 위해서 싸움을 시킨 것입니다. 같은 핏줄끼리 원수가 되어 싸우는 짓은 한없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

‘밥데기 죽데기’에는 ‘철조망이 녹아내렸어요’란 글이 있다. 서울과 평양의 집집마다, 가게마다 있는 달걀에서 병아리들이 깨어나면서 휴전선 철조망을 비롯해 탱크, 장갑차, 대포, 군인들의 철모, 심지어 사람들 마음까지 녹여 통일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최근 읽은 책으로 2015년 노벨문학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가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히틀러 군대가 침공하자 조국을 구하고자 참전한 러시아 소녀 병사들 이야기다.

“전쟁이 터지자...나는 죽고 싶지 않았어. 처음 총을 쏠 때 얼마나 무섭던지. 나는 원래 캄캄하고 울창한 숲도 무서워하는 아이였는데 소총, 권총, 기관총까지 다루지 못하는 총이 없게 되었어. 전쟁 내내 생각했어, 내가 지금 집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트럭을 타고 가다보면 사람들이 죽어 누워있는 게 보였어, 짧게 깎은 머리가 파르스름한 게 꼭 햇빛에 돋아난 감자 싹 같았지. 그렇게 감자처럼 사방에 흩어져 있었어.”
“아, 아 그 상처들...넓고 깊고 찢긴 상처들, 정말 미치지 않은 게 신기해. 총탄, 수류탄, 포탄 파편들이 머리며 내장이며, 몸 구석구석 안박힌 곳이 없었어. 심장은 아직 살아서 뛰는데 그 병사는 죽어 가는거야.”

우리도 이같은 전쟁을 겪었다. 6.25 관련자료나 출판물, 영상기록물, 기념관, 체험관 등등을 잘 보존하고 남겨서 후손들이 보고 느끼게 해야 한다. 다시는 동족상쟁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가르칠 의무와 책임감이 있다. 수천만 가족이 죽고 헤어지고 눈물 흘리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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