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만고강산 유람 할제…

2018-06-15 (금) 김갑헌 /맨체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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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벌써 오래된 이야기다. 한국에서 정치학 교수를 하는 한 친구가 선거 며칠을 앞두고 “유권자 여러분 우리 모두 기권 합시다. 기권하고 낚시나 갑시다. 기권도 여러분의 정당한 권리 행사 입니다”라는 칼럼을 어느 일간신문에 실었다. 예상대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것은 물론이다.

당연히 오늘 칼럼에는 나도 트럼프와 김정은이 엊그제 연출한 한마당의 코미디에 대해 왈가 왈부 하는 글을 써야겠지?

시간과 정력 낭비라고 생각 했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치 광대들이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그들의 풍악에 맞추어 “품파 품파”를 읊으며 각설이춤을 추는 한국의 모습이 너무도 처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뻔한 결론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 김정은이… 큰 일 낼거라는 새로운 기대를 가진 사람들은 이제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골방에 깊게 숨겨논 죽장(竹杖)이나 찾아 들고 휘영청 달빛 밟으며 “어화 어화 벗님”찾아 만고강산을 유람하는 것이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신 건강을 위해 좋지 않을까?

“만고강산 유람헐제 삼신산이 어디메뇨, 죽장짚고 풍월실어 봉래산을 찾아갈제, 서산에 해는지고 월출동녕 달이뜨니, 어화 벗님네야 우리님은 어디갔나,어화좋다 어화좋다 우리님을 찾어가자.”

여행을 하면서 오래 만나지 못한 친구들을 찾아 반갑게 만나고 밤을 새워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하는 것은 예로 부터 전해오는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배꽃이 만발한 사립문 앞에 “이리 오너라…”천둥소리에, 버선발로 뛰어나가 “어화 좋다” 반가워 하던 “우리님” 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을까?

그리운 친구가 몇이나 되나 헤아려 본 적이 있었다. 공자님은 멀리에 있는 친구가 스스로 찾아오는 기쁨을 인생삼락(人生三樂)의 하나로 꼽는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 하셨다.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릴 만한 친구가 몇이나 될까? 이런 질문들은 사실 우리가 참으로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 하는 계기가 된다.

우리는 잠시라도 정치공해와 문명의 소음에서 떠나, 만고강산 속에 길 잃은 나그네가 되고 외로운 순례자가 되어야 한다. 외로움 속에서 자신에 대해 사색 하고, 관계와 존재의 의미를 명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 이다. ’

사색은 우리 시대에 잃어버린 덕목의 하나”가 되었다고 존경하는 지인에게 메시지를 보낸 기억이 난다. 사색과 명상이 없는 사람일수록 남이 펴놓은 멍석 위에서 춤추기를 즐기며, 민족과 국가와 통일과 애국심을 논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다.

허황한 이념과 흔들리는 촛불 속에 휩쓸리는 중우정치를 시대정신의 성취로 오해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 한다. 아, 참으로 피곤한 세상이다.

자, 이제 우리 모두 일어나 만고강산 유람이나 가세. 죽장 짚고 외로운 길 가세. 가다 외로우면 내 속에 고이 감춰둔 나를 찾아내어 전에 없던 깊은 대화나 한번 나눠보세!

<김갑헌 /맨체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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