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교육 칼럼

2018-05-30 (수) 대니엘 홍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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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가 길거리로 나간 이유

동부에 있는 대학 3학년에 재학중인 한국 유학생 P는 지난 겨울 방학 때 슬리핑백 한 개만 들고 길거리에 나가 3주 동안 노숙자들과 함께 지냈다. 방학 동안 대학 기숙사에서 지내거나 친구의 집에서 지낼 수도 있었지만 굳이 눈바람 몰아치는 겨울 날씨에 길에서 생고생을 자처한 이유는 무엇일까.

스위스 출신 소설가 로베르트 발저가 쓴 <벤야멘타 하인학교: 야콥 폰 군텐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 야콥은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쓸모 있는 인간, 즉 하인이 되어 주인을 섬기는 것을 실현하려고 하인학교에 자발적으로 입학했다. 학교 생활에 관해 야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없다. 벤야멘타 학교의 학생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쓸모 없을 것이다. 훗날 우리 모두는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대학에서 컴퓨터와 인공지능을 전공 분야로 선택한 P는 야콥과는 달리, 미미한 존재가 아닌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 예속된 존재가 아닌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존재가 되는 것에 배움의 의의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분을 하향조정하고 하인학교에 자원한 야콥처럼, 왜 P는 낯설고, 을씨년스럽고, 불편한 길거리로 자신을 내몰았을까.


낮은 데로 임한 야콥의 영향을 받아서도 아니요, 2016년 대선 경선 주자로 나서서 대학
캠퍼스에서 인기몰이를 했던 버니 샌더스의 영향을 받아서도 아니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필연적 그림자, 즉 독식하는 1% 뒤에 처진 99%가 겪는 상실감과 허탈감을 느껴 일인시위를 하러 노숙자와 함께 지낸 것이 아니다.

방학동안 친구들은 인턴십을 하거나 자기계발 서적을 파고 들었지만, P는 실리콘밸리의 성공 신화를 탐독하거나 방법론에 가득 찬 노하우 책에는 무관심 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알리고 내세우는 것 또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노숙자들과의 3주간 생활을 유튜브에 올리거나 블로그에 남기지 않았다.

나아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 등장한 주인공처럼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길에 나선 것도 아니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와 친구들처럼 자신들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길에 나선 것도 아니다.
도대체 왜 P는 노숙자 생활을 했을까. 초중고 대학을 거치면서 P는 세 가지의 뇌물에 익숙했다.

점수, 스티커, 트로피와 함께 따라온 칭찬에 익숙한 P는 부모, 교사, 교수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했고 그들의 인정과 칭찬이 없으면 불안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타인의 잣대에 따라 자신이 휩쓸리는 모습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부모가 늘 강조하는 확실성과 안전성을 따르다 보니 점점 안정, 안락, 안전으로 점철된 편안한 환경(comfort zone)만 찾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comfort zone에서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멀리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최고조의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이 방법이었다. 그래서 길거리로 나갔다.

추운 겨울 길거리는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P는 말했다. 노숙자들과 동거하면서 딱히 배운 것도 없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노숙자들과 지냈던 경험은 평소에 자신이 생각치 못했던 질문들을 쏟아냈다. 던져진 질문에 자신만의 대답을 찾기 위해 P는 올 여름방학을 시작하자마자 캐나다 밴쿠버에서 몬트리올까지 동서횡단을 하고 있다. 달랑 백팩 하나만 매고 히치하이킹을 하면서.

<대니엘 홍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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