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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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랑을 생각하며

2018-05-26 (토)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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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관계,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아주 조심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가. 부부(夫婦)다. 부부는 일심동체란 말도 있다. 일심동체(一心同體). 마음과 몸이 하나란 뜻이다. 물리적으로는 두 사람이다. 그러나 관계적으로 볼 때 부부는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어야만 부부 사이엔 문제가 없게 되나, 힘들다.

부부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둘의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태어난 곳과 자라난 환경, 서로 다른 문화의 가정과 교육을 받은 두 사람.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기로 합의했으나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끝까지 참아내는 인내가 결여된다면 언제 파국이 올지 모르는 게 요지경 같은 부부사이다.

지난 7일. 텍사스 델러스에서 발생한 끔찍한 사건. 한인 이현섭(42)씨가 아내 김윤덕(39)씨를 총으로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지른 뒤 자신도 총으로 자살한 사건이다. 이씨는 조지아 텍에서 엔지니어링 박사학위를 받고 루이지애나주립대 조교수로 근무해 왔다. 아내 김씨도 조지아텍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텍사스 A&M대학 교수였다.


끔찍이 사랑하여 결혼했을, 딸(5.딸은 무사)까지 둔 이들 부부사이.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아니 될 이들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참극이 벌어졌을까. 이유는 “아내가 날 무시했다”는 거다. 김씨가 페북(Face Book)에 남긴 말이다. “나를 무시하고 존중하지 않았으며 시부모에게도 잘하지 못했다.”

사랑했던 아내를 죽여야 할 이유가 도저히 될 수 없는 것이 이유가 돼 버렸다. 무시(無視/disregard/ignore). 남을 깔보거나 낮잡아, 낮추어 보는 것이 무시다. 타자에게 무시를 당해 본 경험이 있는가. 아니면 아내나 남편에게 무시를 당해 본 경험이 있는가. 한 번도 무시당해 본 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잘 살아온 거다.

얼마 전 후배 목사를 만난 적이 있다. 식사도 하고 후식도 먹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충격적인 말을 전해왔다. 이혼을 했다는 거다. 그것도 1년이나 됐다고. 그는 60대 중반이다. 결혼한 지 37년째에 서로 갈라섰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 봤다. 이유는 간단했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목사인 나를 너무 무시해 왔다”는 게 이유다.

손주까지 있는 할아버지. 그를 보아 왔을 때 전혀 그들 부부사이엔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늘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던 그. 목회도 참하게 잘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가 70을 바라보고 아내와 갈라서다니. 부부사이란 이런 걸까. 싫어도 참고 살아가는 게 동양적 사고의 부부사이인 줄 알았는데.

과도한 무시 행위일수록 상대방에게는 경우에 따라 살해나 폭행, 원한을 자극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델러스에서 발생한 이현섭씨의 경우 아닐까. 그의 경우. 쌓여온 무시가 한 번에 폭발한 경우라 할 수 있다. 후배 목사의 경우는 아내로부터 쌓여온 무시가 있었으나 한 번에 폭발하지 않았고 해결책은 이혼이었다.

길을 걷다 보면 백발 부부가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가끔 보게 된다. 자주 보는 게 아니다. 가끔이다. 그들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게 있다. 참으로 잘 참으면서, 잘 살아들 오셨구나. 두 남녀가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하더라도 검은머리 백발이 되도록 서로 무시 안하고 존중해 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부부십계명이란 게 있다. “동시에 화를 내지 말라. 화가 났을 때 큰 소리를 내지 말라. 눈은 허물을 보지 말고 입은 실수를 말하지 말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 아픈 곳을 긁지 말라. 분을 품고 침상에 들어가지 말라. 처음 사랑을 잃지 말라. 갈등이 있어도 결코 단념치 말라. 정직해라. 부부는 하늘의 섭리로 됨을 믿어라.”

인생. 길게 살아봐야 90년에서 100년이다. 그중 부부의 인연으로 살아가는 건 훨씬 더 짧다. 실수를 하더라도, 허물이 있더라도, 서로 무시하지 말고 처음 사랑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되지 않을까. 일심동체는 아니더라도 이심이체(二心二體)는 되지 말아야지. 아내와 남편. 서로를 측은해 하며 살아간다면 그것도 꽤나 괜찮을 것 같다.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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