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이다. 하지만 1951년 1.4 후퇴 당시 중공군의 공습을 피해 거제도로 피난하셨다. 부모님은 피난 당시 어린 딸이 둘 있었는데 사정상 맏딸은 한달 후 다시 돌아와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할머니께 맡겨 두신 채 둘째 딸만 데리고 월남하셨다. 하지만 치열한 전쟁과 3.8 선 강화로 인해 “한달 후”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다. 이후 이산가족 찾기 때, “혹시?” 의 심정으로 찾아 나섰으나 결국 찾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맏딸이 보고 싶을 때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 딸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셨다. 어머니 역시 마지막 헤어질 당시의 딸의 모습을 그리며 서러움을 견디지 못해 자주 훌쩍이셨다. 나는 부모님의 슬픔, 서러움, 죄책감, 그리고 분노가 엉켜진 한을 고스란히 온 몸으로 받으면서 자랐다. 자연스럽게 나 역시 한번도 본 적 없는 큰 누나가 보고 싶었고 부모님 고향에도 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마음의 아픔을 느끼며 살아왔다.
우리 가족이 슬픔을 달랠 수 있었던 가장 큰 통로는 북한 음식이었다. 어머니는 함흥냉면, 가자미 식혜, 명란 젓, 그리고 양미리 구이와 같은 것들을 자주 만드셨다. 그래서 나는 이북 음식을 좋아한다. 하지만 두고 온 딸을 결국 다시 못 보고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안 계시기에 그 음식 맛도 점점 잊혀지는 듯 하다. 서글프다.
물론 이것이 우리 가족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통계에 의하면 나처럼 실향 2세를 포함한 숫자만 해도 대략 5-6백 만명 이라고 한다. 3, 4대로 가면 천만이 넘는다. 실향민 2세대인 나도 부모님 고향이 궁금한데 1세대들은 오죽 그리우실까? 사실 실향민뿐 아니라 분단의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공감하는 아픔 아닐까? 몇 년 전 방영되어 폭발적 반응을 얻은 영화 국제시장 이 이를 잘 대변한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부모님 고향을 가보고 싶다. 그곳에서 어머님이 그토록 좋아하셨던 만개한 철쭉 꽃을 보고싶다. 부모님이 사시던 동네에 있다던 본궁 (이성계가 아들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상왕으로 밀려난 후 한동안 살던 집. 함흥차사의 배경지) 뜰에 앉아 부모님을 그리며 함흥냉면과 가자미 식해를 먹고 싶다. 그리고 혹여라도 살아 계시다면 나의 큰 누나와 얼싸 앉고 부모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밤샘 이야기로 서러움을 풀고 싶다.
그래서인지 지난 4.27 남북정상회담을 보며 많이 울었다. 왠지 나의 소망이 현실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미 정상회담도 예정 되어 있어 곧 꿈이 현실화 될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그 느낌이 나만이랴! 나는 물론 수 많은 실향민과 모든 한국인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그래서 기도한다: “하나님, 꼭 고향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기왕이면 한 맺힌 3.8선을 관통하는 남북 직통 고속도로를 (고속철) 통하여서요!” 시베리아와 유럽까지 갈 수 있다면 금상첨화 이고요!
만일 기도가 응답된다면, 부모님이 사시던 고향에 교회를 세우고 싶다. 그리고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고향보다 더 귀한 본향을 알려주고 싶다. 그곳은 더 이상 슬픔, 서러움, 눈물이 없는 영원한 안식처임을 말해주고 싶다. “본향을 향하여” 를 부르며 고향은 인간의 영원한 안식처인 본향의 그림자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서 우리의 지난 과거의 아픔을 나누며 서로 달래고 위로하며 기쁨을 나누고 싶다. 나아가 현재적 고향의 기쁨을 누릴 뿐 아니라 완성될 고향인 본향을 소망 중에 바라보도록 돕고 싶다.
갑자기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그려진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이사야 3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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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철 목사/천성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