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하는 후배 간호사에게

2018-05-15 (화) 나 리/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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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호사 나리 씨의 사는 이야기

후배야. 네가 보낸 ‘언니 힘드네요.’라는 메시지를 읽고 이렇게 편지를 쓴다.

‘힘들다’는 그 마음을 알기에 위로가 쉽지 않네. 간호사이면서 엄마, 아내, 며느리 역할에 공부하는 대학원생으로 열심히 사는데 삶은 그만큼 답을 해주지 않지? 잘하려 할수록 앞이 안 보이고 내 에너지가 방전만 되는 순간들의 연속으로 우리의 ‘힘들다’가 설명될 수 있으려나?

한국에 있는 간호사들은 미국에 오면 봉급도, 대우도, 생활도 모든 게 좋아질 거라 믿어서 다들 한 번쯤은 미국행을 시도해보는 것 같아.


그 중에 어려운 자격증 따서 직장을 구해 미국에 오는 간호사는 극소수지. 그렇게 왔다면 이곳이 좀 더 편해야 하는데 여전히 ‘힘듦’은 존재하네.

미국에도 ‘갈굼’이 인종차별과 섞여서 우리를 괴롭히고, 환자보다는 컴퓨터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갈등 속에서 그래도 사명감을 가지고 버티지만 ‘힘들다’에 난 결국 도망 나왔어.

올해는 유난히도 겨울이 춥고 길었지? 5월이 돼야 봄 냄새가 느껴져. 그거 알아? 우리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진 사계절이 바뀌는 걸 알 기회가 없었어. 그저 수능까지 ‘며칠 전’으로 우리 삶의 시계가 돌아갔고 대학생이 돼서도 고등학교처럼 시간표가 꽉 짜인 간호학과 수업을 들으며 역시나 계절을 모르고 지냈지.

가끔 수업을 자체 휴강하고 영화관 갈 때나 길에 핀 개나리를 봤어. 졸업하고 취직 후에도 들어간 직장서 살아남기 위해, 또 미국행을 위해 치열하게 사느라 대한민국의 파란 하늘을 몇 번 못 보고 미국에 왔고...

미국에 와 12시간 근무를 위해 새벽에 나가 밤에 집에 들어오고, 쉬는 날은 집안 살림하느라 시간과 계절을 느껴 본 적이 없다는 걸 최근에서야 깨달았어. 그래서 처음 근무했던 필라델피아의 봄에 대한 기억이 없어.

후배야 너는 어떠니? 너도 뉴욕의 봄이 기억나니? 삶에 여유를 채우지 않으니 바쁜 삶 속에서 방전되고 지치는 건 당연한 것 같아.

병원 일에 대학원이 너무 힘들 땐 그냥 잠시 맛있는 커피를 들고 하늘을 한 번 봐. 냄새를 맡아봐. 계절마다 냄새가 틀려.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들어봐 그러면서 내가 지금 가는 방향에 대해서 한번 확인 해봐.

병원을 그만두고 나서 보니 간호사라는 직업이 정말 매력적인 직업이더라. 누군가의 생명이 위급할 때 바로 옆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것 같아. 그리고 너는 그 자리에 지금 있는 거야. 다시 한 번 너의 소중한 위치를 생명이 기지개 펴는 봄 냄새를 맡으면서 느껴봐.

후배야, 여름이 오기 전에 한번 만나서 같이 봄을 느껴보자. 그리고 봄의 기운을 환자들과 가족들과 같이 나누면서 봄의 희망으로 마음을 채워보자. 연락할게.

<나 리/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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