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린이 사랑

2018-04-30 (월) 최효섭/ 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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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신의 창조 중 최고의 걸작품이다. 그들은 말과 같은 식욕을 가졌고 칼을 삼키는 마술사의 소화력을 지녔다. 기관차의 정력을 가졌는가 하면 고양이와 같은 호기심을 가졌다. 독재자의 허파를 소유하고 시인의 상상력을 가슴에 품었다. 어린이는 무조건 모두가 천사이며 예술가이다. 그들은 새와 얘기할 수 있고 별 나라를 왕래한다. 그들은 꽃이나 나비와도 함께 논다.

어린이는 제비꽃의 부끄러움을 간직하는가 하면 사냥개의 담대함도 지녔고 분화구의 정렬도 가졌다. 그들은 놀라운 마술사이다. 당신이 아이들을 골방으로 내쫓을 수는 있지만 당신의 심장으로부터 쫓아 낼 수는 없다. 그대가 아이들을 서재와 부엌으로부터 추방할 수는 있으나 그들을 마음으로부터 때어 놓을 수는 없다.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요, 우리가 땀 흘려 만드는 법과 제도와 문화를 이어 갈 주인공이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귀찮거나 시끄럽다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그대의 착각이 아니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평화스러운 소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른의 웃음소리보다 아이들의 우는 소리가 훨씬 아름답다. 그대의 아이가 떠들면 안심하고 기뻐하라. 그 아이는 매우 정상인 것이다. 그대의 아이가 너무 조용하면 그 때부터 그대는 걱정해야 한다. 그대의 아이가 너무 많은 것을 묻는다고 귀찮아하지 말라. 부모가 대답할 수 있을 만큼의 질문을 하는 아이는 비정상적이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기관총처럼 물어올 때 그대는 기뻐해야 한다. 그대의 아이는 아주 정상적으로 잘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 제1조에 “어린이는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어린이라는 꿈나무의 토양은 ‘따뜻한 가정’이다. 싸우는 가정, 억압적 분위기의 가정, 싸늘한 가정에서 내일의 꿈나무가 밝고 아름답게 자랄 수는 없다. 그리고 ‘사랑 속에서 자라야 한다.’ 사랑이란 햇볕에 듬뿍 쬐이며 자란 아이와 사랑 결핍 속에 시들시들 자란 아이와는 큰 차이가 있다.

예수가 남긴 인상 중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어린 아이를 안고 기도하는 모습이다. 예수 곁에는 늘 아이들이 있었다. 제자들은 성인의 접근은 환영하였으나 아이들이 몰려오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어리다고 차별하는 제자들의 태도를 꾸짖고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는 어린이에게서 천국 시민의 자격을 보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일일이 안고 축복하셨다.

아이는 부모를 통하여 오지만 그들의 출발지는 하나님이다. 투자 중에 가장 값진 투자는 어린이를 위한 투자이다. 5월 5일은 전통적인 한국의 ‘어린이 날’이다. 이 날이 법령으로서 공휴일로 공포된 지(1956년) 62년이 되었다.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가족적 휴일이니 얼마나 좋은가!

종교심리학자 보니 교수에 의하면 개종자(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자)의 55%가 20세 이전에 개종하였다는 것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입증하는 연구이다. 재미있는 통계는 미국 남성 3분의 2가 자기는 교회에 안 가면서 아이들은 주일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모순이지만 바람직한 인간 형성에 있어서 신앙교육의 위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시인 타고르는 “모든 아이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절망하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를 품고 탄생한다.”고 하였다. 어린이는 소망이다. 예수는 아이들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의 메시지, 곧 미래를 향한 인류의 가능성을 보셨던 것이다.

<최효섭/ 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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