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교육 칼럼

2018-04-04 (수) 대니엘 홍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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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혹한 현실

1941년 하버드는 지원자의 92%를 받았고, 1965년에는 20%, 1992년 14.6%, 2010년 9.7%를 합격 시켰다. 그리고 올해는 4.59%에 그쳤다. 1979년 MIT 합격률은 33.6% 이었지만 올해는 6.7%로 주저앉았다. 1997년 무려 71% 합격률을 보였던 시카고 대학은 올해 7.1%를 합격시켰다. 이외에도, 예전에는 두자리 숫자의 합격률을 보였지만 수년전 부터 한자리 숫자를 보이는 대학이 줄줄이 늘고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긴걸까. 대학의 학문 수준이나 취업률이 치솟아서 지원자들이 몰린게 아니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자녀 숫자가 급증하면서 일자리 공급과 수요에 불균형이 생겼고, 대학 졸업장이 취업과 직결된다는 공식이 자리 잡았으며, 공동지원서를 이용해 20개 대학에 지원서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합격률이 낮아지면서 학생과 부모는 자연스레 “낮은 합격률=좋은 대학” 이라는 획일적인 기준을 지니게되었고 어떤 학생이 어느 대학에 합격했는지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합격자들이 대학 재학중에 어떤 수준의 교육을 받고 누구의 영향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는지에는 무관했다. 나아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이 경험하는 것을 남의 이야기로 여겼다.


2015년에 발표된 <대학생 정신건강 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자살을 시도하거나 자해를 할 정도로 극심한 정신 질환 증세로 인해 캠퍼스 카운셀링 센터를 찾은 대학생은 2009년 부터 2015년 사이 30%나 증가했다. 또한, 2017년 <미국 대학 건강협회>가 92개 대학 6만3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대학생의 40%가 학업이나 캠퍼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우울증 증세를 보였고, 60%는 불안장애를 보였다.

빚을 내서라도 대학 졸업장을 따면 신분 상승이 가능했던 시절의 기억을 지닌 부모 세대로 부터 학생들이 배운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를 물리치고 그들 위에 올라서면 쓸모있는 인간, 즉, 리더가 될 수 있다 라는 전략이다. 여기서, 쓸모있는 인간의 기준이란 돈을 잘버는 경제적인 것과 윗 사람에게 복종하는 정치적인 것이다. 그런 환경에 익숙한 학생의 태도는 이렇다. 의사가 암 환자에게 당신은 90% 가망이 없다고 말해주면 대부분 환자는 포기하지만, 살수 있는 희망이 10% 있다고 말해주면 치료를 받아보겠다 라는 의지를 보여주는 환자처럼, 학생은 5~10%의 합격률에 희망을 걸고 대학 입시 준비를 한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서 부터 생기는 문제에 관해서는 생각지도 따져보지도 않는다. 고등학교 때 까지는 우등생으로서 학교의 중심 인재였지만 전세계에서 몰려든 학생들로 구성된 환경에서는 점차 주변으로 밀리는 것을 느낀다. 쏟아지는 과제물, 원활하지 못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외로움으로 사이버섹스에 중독이 되거나 그저 다른 학생들의 의견과 행동에 끌려다니는 수동적인 학생으로 변화된다. 그리고, 졸업할 때가 되면 본격적 걱정이 시작된다.

학자금 융자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 붉은 카펫을 깔아놓고 자신을 기다리는 회사가 없다는 현실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K-16 장기간의 학교 생활을 통해 학생이 배운 것은 졸업장이 있어야 취업을 할 수 있고, 누군가를 위해서 일하는 회사에 취업하는게 정상이라는 획일적 가치관이다. 과연 그럴까.

방글라데시에서 빈민들에게 무보증, 무담보로 창업을 위한 소액 대출을 해주며 가난 퇴치에 앞장선 공로로 20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무하마드 유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회사에 취직하려고 태어난게 아니다. 이력서를 제출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려고 세상에 나온게 아니다. 일자리를 얻으려고 노력하기 보다 일자리를 창출 하려고 생각하고 움직여라. 모든 사람은 창조자이다. 일자리를 기대하지 말고 자신의 것을 창조하라.” 그렇게 된다면 대학의 합격률에 신경 쓰기 보다 자신의 속에 무엇이 꿈뜰거리고 있나를 관찰할 것이다.

<대니엘 홍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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