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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칼럼] 방임

2018-02-15 (목) 김문철 목사/ 천성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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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단편 영화 “44번 버스” 를 본 적이 있다. 한 여자 버스운전사가 승객을 가득 태운 채 시골길을 달리고 있다. 가던 도중 한명의 청년을 태운다. 이 청년은 2시간을 기다렸다며 운전사에게 감사해 한다. 한참 가다가 또 다른 두명의 남자를 태운다. 그런데 강도다. 강도들은 승객들의 금품을 갈취한다. 게다가 운전사를 버스 밖으로 데리고 나가 성폭행한다. 앞서 탄 청년이 따라 나서며 이를 만류하지만 강도들의 흉기에 찔려 제지당한다.

지옥을 경험한 여자 운전사는 다시 버스로 돌아온다. 그리곤 승객들을 원망스럽게 쳐다본다. 그 사이 성폭행을 만류했던 청년이 다시 버스에 타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운전사가 그 승객에게 화를 내며 차를 타지 말라고 소리 친다. 그리곤 그의 가방을 획 던져주며 버스 문을 닫는다. 청년은 “난 너를 도와주려고 했는데 왜...” 라며 운전사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다.

버스에서 내 몰린 청년은 할 수 없이 지나가던 승용차를 얻어타고 간다. 그런데 저 앞에서 경찰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대형 교통사고를 수습중이었다. 확인해 보니 버스 한대가 다리 밑으로 떨어져 운전사와 승객 전원이 사망한 참사였는 데 바로 자기가 탔던 44번 버스였다. 청년은 그 때서야 운전사가 왜 자기에게 버스를 타지 말라며 화를 냈는지를 이해한다.


몇주 전 한국의 한 여검사의 성폭행 피해 폭로로 검찰에 지진이 일고 있다. 이후 여기 저기서 유사한 폭로가 잇다르면서 법조계를 넘어 전 영역에서 지금까지 벽장 속에 감추어져 있던 더러운 빨래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왜? 지금까지 불의함을 마치 당연히 그래도 된다는 불의한 관행처럼 자연스럽게 허용해왔기 때문 아닐까?

어떤 이들은“꼭 그렇게까지 해야...”라는 반응을 보인다. 제법 관대해 보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더 악하다. 방임이기 때문이다. 방임은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을 하지 않는 죄다. 악이 힘을 발휘하도록 방치하기 때문이다. 침묵의 패턴화를 형성시켜 악의 당연성을 개발하기 때문이다. 방임이 악한 관행과 손 잡으면 약자를 길들이는 힘을 발휘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데 뭘. 살아 남기 위해서는 받아 들여야겠지.” 라며 지옥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예수께 데려오는 이야기가 있다.(요 8장) 물론 예수를 올가미 씌위기 위한 수법이다. 모세법으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면 로마법에 어긋나고, 용서하라고 하면 모세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그 어떤 대답도 예수께서는 궁지로 몰린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사실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 현장에 간음한 여인만 있고 간음한 남자는 없다는 것이다. 왜? 악한 관행이 남자는 도망가게 허용한 것이다. 수치와 피해는 여자만 받게 만드는 이중 잣대가 적용된 악이다. 둘째는 그런 악을 보면서도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방임하는 군중들이 있었다. 그들의 방임은 불의한 고소를 은근히 즐기며 오히려 여인의 수치를 당연시 여긴다. 그래서 악이다.

성폭행은 죄다. 그것은 폭로되어 마땅한 악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당연한 것처럼 허용하거나 심지어 동조하며 은근히 즐기는 방임도 악하다. 왜냐하면 피해를 막을 수 있는 기회를 침묵으로 파괴했기 때문이다. 영화 “44번 버스” 에서 최고 악당은 성폭행을 한 강도다. 하지만 지옥을 경험한 운전자가 가장 경멸한 자들은 피해를 방임한 승객들이었다. 방임이 얼마나 악한 죄인가를 보여주는 메시지다.

혹여 나는 "지금까지 그래 왔는데 뭘..." 이라는 이름 하에 불의를 방임하는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그들(방임자)이 …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다 도망가거늘)…”(요 8:9)

<김문철 목사/ 천성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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