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다들 ‘소원 챙기기’에 분주하다. 새로움이 가져다주는 특별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나간 해는 ‘묵은’ 해로, 맞이할 해는 ‘새’해로 부르는 데서 연유하는, 마치 새 신발 신으면 날아갈 것만 같은 인간의 오묘한 착각 본성이 바로 이런 때 소원성취를 불러일으켜줄 거라고 자연스럽게 믿는 것이다. 나 역시 새해를 맞이하며 그 심성에 같이 기대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이 새해에 나만의 몇 가지 소원을 챙겨보기로 했다.
그 첫 번째 것은 “좋은 시력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이다. 시력 저하는 노화현상의 관문이다. 이미 오래 전 얘기다. 어느 날 설교 도중 설교원고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알았다. 노안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그 후 내 안경은 해가 바뀔수록 급격히 진화했다. 원래 심한 근시인데다 이제 가까운 곳마저 거리조절을 해야 하는 노안까지 겹쳐, 가까이 있는 글 멀리 있는 글을 동시에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하니 보통 복잡한 노릇이 아니다. 다행히도, 이런 내 자신이 안과학과 광학의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큰 축복이다.
하지만 내 눈이 더 이상 좋은 쪽으로는 개선될 리 없을 것 같아 불안하다. 한두 시간만 컴퓨터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어도 눈만이 아닌 온 몸이 다 피곤하다. 특히 시력 저하 때문에 글 읽는 일 맘 편히 못할 거라는 사실은 과거엔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생긴 소원이 이것이다. 죽을 때까지 글 읽을 수 있는 시력을 유지했으면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소원은 “튼튼한 다리를 갖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맘 놓고 해오던 스포츠를 이런저런 부상으로 하지 못하는 걸 경험하면서 생긴 소원이다. 최근에 생긴 테니스 엘보우로 인해 반평생 쳐오던 테니스를 일단 접었다. 이 엘보우 현상은 더 먼저 찾아온 우측 어깨 오십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니, 엘보우가 나아도 어깨 때문에 아마 영원히 테니스를 관둬야 될지도 모를 일이다. 중년의 우울함은 이런 데서도 오는 거구나, 하는 걸 경험할 수 있는 계기였다.
튼튼한 다리의 소원이 생긴 이유는 팔로 못할 운동을 다리가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운동들의 유일한 보루이기 때문이다. 테니스를 못 친 이후로 걷기에 매진하고 있다. 걷기는 지금까지도 내겐 즐기는 운동이 아니다. 체력 유지를 위해 할 수 없어서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걸으면서 느낀 사실이다. 다리마저 약해지면 절대 안 되겠구나, 죽기 전까지 걸을 수 있는 다리 유지하는 것도 대단한 축복이겠구나, 하는 것이다. 이래서 튼튼한 다리가 내 두 번째 소원이 되었다.
마지막 세 번째 소원은 “나와 함께할 수 있는 영역을 공감하며 누릴 수 있는 친구 몇을 내 곁에 두는 것”이다. 그 친구 몇 중 아내도 당연히 거기에 포함된다. 예를 들어, 내 평생 소유해온 가장 소중한 자산인 기독교신앙을 공감할 수 있는 신앙 동반자 같은 존재다. 기독교 신앙에도 다 컬러가 있다. 내게도 나만의 신앙 컬러가 있다. 그 컬러를 내 마음의 캔버스에 멋지게 칠하고 있을 때, 내 곁에 다가와 그 그림에 같이 찬동하고 지지해줄 수 있는 신앙의 친구들 말이다. 이런 이들과 죽을 때까지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로 이런 소원이다.
여기엔 꼭 신앙만 있는 게 아니다. 취미도 이에 포함될 수 있다. 은퇴 이후에(약 10여년 뒤?) 뭘 하고 지낼까 내 나름대로 미리 연구하는 중이다. 상상컨대, 그것들만 잘해도 꽤 바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겐 어딘가에 푹 빠지는 구석들이 다 있다. 뭐 저런 거에 저렇게 열을 내나 싶지만, 거기에 열을 내는 사람은 반드시 있다. 그런데 내가 열 내고 있는 그 곳에 같이 열을 낼 수 있는 친구를 만났다. 얼마나 반갑겠는가. 그래서 나 역시도 나 좋아하는 그것을 공유하고 같이 누릴 수 있는 몇몇의 친구들이 내 곁에 함께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목사가 되어가지고 뭐 이런 것들에다 소원장을 내밀까 하는 핀잔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짧은 인생 경험을 통해 깨달은 건, 꿈이 거창할수록 욕심도 같은 사이즈로 똑같이 부풀려지더라는 사실이다. 그 부풀려짐은 주변에 반드시 여러 종류의 인생 부작용을 낳는다. 그래서 잠시, 그 욕심을 절제하며 소박한 소원 몇 가지를 정리해보았다. 소원이 가난해질수록 그 소원을 품은 그 사람의 마음은 더 넓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과 함께. 새해가 왔다. 독자들께서도, 이런 소박하나 정말 소중한 꿈 한번 꿔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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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