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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 박사.이스트베이 평생교육원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강

2017-12-14 (목) 손수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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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 평신도가 세례 통해 사제되는 ‘만인사제직’ 선포

▶ 종교 개혁 구원론을 다시 살리고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김홍기 박사.이스트베이 평생교육원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강

김홍기 박사가 이스트베이 평생교육원에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강을 하고 있다.

금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성곽예배당 정문에 면죄부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참 회개를 연구하고 대화하는 95개조의 항의문을 라틴어로 게시하고, 학문적으로 토론하기를 제안하였다.

그런데 루터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삽시간에 유럽 전역에 확산되어 종교개혁운동에 운명적으로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역사를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역사의 중심에 루터는 서게 되었다.


김홍기 박사는 종교 개혁 500백주년을 맞이하여 종교개혁 구원론을 다시 살리고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고 믿고있다. 루터의 종교 개혁 5백주년을 맞이하여 종교 개혁이 주는 역사적 의미와 변혁 운동을 소개한다.

다음 내용은 김홍기 박사가 지난 10월 19일 이스트베이 평생교육원에서 행한 ‘종교 개혁 500주년 기념 특강을 정리한 것이다. 교회사 전공의 김홍기 박사는 감리교 신학대학교 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오이코스대학교 대학원장과 이스트 베이 평생교육원 원장 직을 맡고 있다. <손수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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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이 일으킨 역사적 변혁운동

참 회개의 의미를 보여준 변혁운동: 95개조의 항의문에서 참 회개는 면죄부를 사는 외적 행위가 아니고, 내면적으로 통회 자복하는 것임을 지적하였다. 참 회개는 면죄부를 한 번 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회개하여야 함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어려운 학문적인 언어인 라틴어로 써서 95개조를 신학교교수들이 토론하기를 원하였으나,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독일어로, 영어로,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전으로 전 유럽에 확산되게 되었다.

- 중세사의 전체주의에 항거하는 현대사의 개인주의의 존엄성을 보여준 변혁운동

유럽을 지배하던 교황 레오 10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찰스 5세의 전체주의 사회에서 한 개인 루터의 영성적 자각에 근거한 한 개인의 외침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개인주의(individualism)의 존엄성을 보여준 변혁운동이었다. 개인의 생각과 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한 에라스무스 등의 인문주의(humanism)의 영향으로 루터가 개인적 주관적 견해를 피력하기 시작하였다. 루터가 개인적으로 복음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된 비텐베르크데학교 교수서재 탑의 경험이 전 유럽과 세계에 영적 각성을 불지르는 운동이 되었다.

학자들이나 역사가들의 개인적 견해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중세기가(Medieval Age: AD 590-1517) 막을 내리고, 현대사(Modern Age)가 열리는 시점을 종교개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칼 홀(Karl Hall),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ch), 막스 베버(Max Weber) 등이 종교개혁이 현대사의 시작으로 해석한다.

- 영광의 신학에 도전하는 십자가신학


루터는 1518년 [하이델베르크논제]에서 어거스틴 수도사들에게 자신의 신학을 십자가신학이라고 변증하였다. 중세 천주교신학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이성적으로 추구하는 영광의 신학(theology of glory), 자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과 계시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십자가 신학임을 주장하였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어거스틴이 주장한 십자가의 은총신학을 재발견한 것이다.

- 교황의 권위보다 성경의 권위로 돌아가는 변혁운동

루터는 1519년 라이프지히 논쟁에서 교황무오설을 변증하는 천주교회신학자 에크(Eck)에게 대항하여 교황도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성경을 교회의 최고의 권위로 두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하던 것에서 모든 평신도도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 민족주의의 부흥을 일으킨 역사변혁운동

신성로마제국 황제 찰스 5세의 보름스 국회 재판에 1521년에 불러갔으나(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삭소니(Saxony)지역 영주(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 프레데릭 4세(Frederick the Wise라고도 함)의 보호와 도움을 받아 그의 통치영역 삭소니에서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독일민족주의가 루터를 보호하여 주었다. 스위스도 도시국가들이 쯔빙글리와 칼빈을 도와줌으로 종교개혁운동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황제가 개신교도이면 그 국가는 개신교가 되고, 황제가 천주교도이면 그 국가는 천주교회가 되는 아우스부르크 종교회의를 갖기도 하였다.

면죄부를 팔아서 성 베드로성당 증축에 1/2을 사용하였고, 나머지 1/2은 독일교회가 Fuggers Bank에 빚진 것(주교와 대주교를 많이 세우면서 바치는 세금과 예복 값 때문에 빚짐)을 갚았다. 루터는 독일국민들에게 독일경제를 살리는 민족주의적 호소를 하기도 하였다.

- 성찬의 포도주도 분급하는 2종 성찬의 변혁운동

중세 천주교회는 화체설을 믿었기에 포도주를 분급하다가 흘린 계기로 그리스도의 피를 흘릴 수 없다고 보고 분급을 안 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천주교회는 평신도에게 떡만 분급한다. 그러나 루터는 그리스도가 떡만 아니라 포도주도 분급하였고, 포도주를 마셔야 속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개신교회는 루터 때문에 2종 성찬 곧 떡과 포도주를 모두 분급하게 되었다.

- 성찬중심의 예배에서 설교중심의 예배로 전환되는 변혁운동

중세 천주교회에는 설교가 없었다. 성찬예식(미사)만 예배에 있었다. 루터가 말씀이 믿음을 일으킨다고 강조하여 설교를 예배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는 1부 설교와 2부 성찬을 함께 갖는 예배를 드렸다. 이러한 전통이 다시 부활하여야 한다.

- 각 나라 언어의 예배와 각 나라 언어의 성경번역운동

루터 이전의 중세 천주교회는 라틴어로 예배를 드렸다. 루터는 각 나라의 언어로 예배 드리는(vernacular) 운동을 일으켰고(루터 자신이 독일어 찬트와 찬송 작사와 작곡을 함), 각 나라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루터 자신이 바르트부르크 성에 갇혔을 때 노동자들도 알 수 있는 쉬운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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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하는 변혁운동

성직자들이 동정을 지키는 중세 수도원전통을 개혁하여 수도사들과 수녀들을 중매하여 결혼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캐더린 본 보라(Catherine von Bora)는 파트너가 없자 자신이 결혼하기로 결단하였다.

- 만인사제직(priesthood of all believers)

모든 신자들은 모두 사제라는 해석을 한 것은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중세에는 안수를 받은 성직자만이 사제라는 절대권위의식이 강하였다. 그런데 평신도도 세례를 통하여 사제로 성별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니까 성직자나 평신도나 사제라는 지위(status)에는 차이가 없고, 다만 기능(function)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성직자의 기능은 설교와 성찬 집례의 목회적 기능이 있고, 평신도는 세속직업 속에서 하나님의 소명(vocation)에 충성하는 것이다. 아무리 천한 직업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천직으로 생각하여 최선을 다하여 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자기 직장을 천국으로 만드는 소명까지 말한다. 안수를 받은 성직자 사제는 전문사제이고(ministri), 안수를 안 받은 평신도사제는 비전문사제(sacerdotes)라고 구분 짓기도 한다. 이것이 나중에 독일 경건주의와 웨슬리 시대에 와서는 평신도 설교가의 역할까지 강조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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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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