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불법 체류자가 세운 나라다. 1607년 아메리카 대륙의 첫 식민지인 제임스타운이 생긴 이후 1776년 미국이 건국되기까지 원주민인 인디언의 허가를 받고 신천지에 온 사람은 하나도 없다. 미국이 세워진 후에도 오랫 동안 미국 땅을 밟은 사람에게는 자동적으로 합법 체류 자격이 부여됐다. 미국에서 첫 이민법이 제정된 것은 건국 후 100년이 지난 1875년이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가 막바지에 접어든 1882년 중국인들이 백인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여론이 일면서 ‘중국인 배척법’이, 1924년에는 유럽 동남부 지역 이민을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민법이 통과됐다. 1930년대 들어 대공황의 여파로 대량 실업이 발생하면서 이민자 유입은 사실상 제로 수준으로 떨어졌다. 제2차 대전이 끝나고 경기가 회복되면서 늘기 시작한 이민자 물결은 1965년 케네디 이민법이 제정되고 1990년 아버지 부시가 이민법을 개정해 이민자 수를 40% 늘리면서 본격화됐다.
이민자 증가와 함께 이들이 백인 토착민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주장도 일고 있지만 이는 근거 없는 것이다. 외국 출신 고학력 하이텍 직종 종사자가 미국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데는 이론이 없다. 미국내 공학 박사의 57%와 컴퓨터 공학 박사의 53%가 외국 출신이다. 이들 중 상당 수는 실리콘 밸리로 유입돼 신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이들 없이는 미국의 하이텍에서의 선도적 위치도 없다.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것은 저학력 단순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불법 체류자 단속 심화와 멕시코의 경제 발전, 저출산 영향 등으로 현재 미국내 불법 체류자 순유입은 사실상 제로 상태다. 이로 인해 건설, 청소, 농장 업계는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합법 이민자 수를 줄인다는 것은 미국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것은 물론 불법 체류자를 불러들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주 합법 이민자 수를 절반으로 줄이는 법안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말로는 시민권자의 기혼 자녀와 형제자매 초청을 폐지하고 고학력자와 영어 구사자를 우대한다고 하지만 새 이민법의 골자는 현행 연 100만 명 수준인 합법 이민자 수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가족 간의 결합을 막고 이민자수를 감축하는 것은 이민자 수를 줄이지 않겠다던 공약을 뒤집는 것은 물론 미국 경제와 인도주의를 해치는 것이다.
이 법안 제정 이유로 내세운 것이 캐나다와 호주도 그런 방식으로 이민자를 받는다는 것인데 인구 비례로 따져 캐나다는 미국의 2배, 호주는 3배에 달하는 이민자를 받고 있다. 이들을 따라 가려면 미국은 이민자 수를 지금보다 2~3배 늘려야 한다.
지금 미국에 들어오는 합법 이민자는 전체 인구의 0.33%에 해당한다. 이는 지난 200년 평균인 0.45%보다 낮은 것이다. 거기다 미국인들의 평균 출산율은 작년 15~44세 여성 1,000명 당 62명으로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때 이민을 줄이겠다는 것은 노인네 밖에 없는 인구 절벽으로 저성장의 늪에 빠진 일본의 뒤를 따라가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다행히 트럼프의 반이민법안 통과 가능성은 희박하다. 연방 상원에서의 공화당 의석이 통과에 필요한 60석에 크게 모자라는 52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공화당 일부 의원들도 반대하고 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으로 작년 대선 후보이기도 했던 공화당의 린지 그레이엄은 이 법안은 “재난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통과 가능성이 별로 없는데도 트럼프가 반이민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자신의 충성 표밭인 저소득 저학력 백인 지지율을 결집해 보겠다는 속셈일 것이다. 지지율 35%에 특검의 대배심 구성과 러시아 내통 관련 증인 소환 등 악재가 겹치고 있는 트럼프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퓨 연구소에 따르면 향후 50년간 미국의 비 히스패닉 백인 인구는 전체의 46%로 떨어지고 미국 내 50개 도시 중 35개 도시에서 마이너리티가 된다. 가주의 경우는 이미 이들은 전체 인구의 39%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작년 저소득 저학력 백인들이 소수계와 이민자를 비하하는 트럼프에 몰표를 준 것도 자신들이 주인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익과 인도주의는 아랑곳 없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들의 편견을 부채질하는 트럼프는 참 나쁜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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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