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계 역사를 바꾼 동물

2025-12-30 (화) 12:00:00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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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조상이 처음 지상에 출현한 것은 5천만년전 북 아메리카 대륙에서였다. 에오히푸스라 불리는 이 동물은 여우만한 크기로 숲속에서 살았다. 이 동물이 초원으로 서식지를 넓히면서 몸집도 커지고 달리는 속도도 빠른 지금의 말 모습으로 진화했다.

그 후 빙하기가 반복되면서 해수면이 낮아져 베링 해협이 육지로 연결되자 일부는 이를 통해 아시아로 건너갔고 대륙 전체에 퍼졌다. 말의 본고장인 북미 대륙에서 이 동물은 멸종했는데 이는 같은 베링 해협을 통해 건너온 인디언들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들판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말이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기원 4천년경 지금 우크라이나가 있는 흑해와 카스피해 북부 연안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나온 말의 유골에서 재갈을 물린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야생마를 인간이 잡아 기르기 시작한 것은 처음에는 식용이 목적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말을 타는 법을 알아냈고 유용한 성질을 가진 말들을 교배해 승마 전용마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언제 누가 이를 시도해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농업을 제외하고 그 때까지 인류 역사에 이보다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은 없을 것이다.

말을 타고 목축을 하면 걸어서 하는 것보다 몇배나 되는 가축을 기를 수 있다. 마차를 만들어 말에다 달면 부족 전체가 장거리 이동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활과 창으로 무장한 기마대가 공격하면 말이 없는 부족은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 말을 처음 길들인 부족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해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의 하나가 인도 유럽어의 확산이다.

18세기 영국의 윌리엄 존스는 인도 벵갈에 판사로 부임하게 됐는데 현지 문화와 실정에 맞는 판결을 내리기 위해 인도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언어의 단어와 문법이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그는 1786년 아시아학회 3차 연례 발표회에서 “산스크리트어는 … 그리스어보다 완벽하고 라틴어보다 풍부하며 두 언어보다 세련돼 있다. 그러면서도 동사의 어근과 문법 형식이 우연의 일치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라고 밝혔다. 일례로 영어로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는 mother, father, brother, sister인데 라틴어로는 mater, pater, frater, soror, 그리스어로는 meter, pater, phreter, eor, 산스크리트어로는 matar, pitar, bhratar, svasar이다. 아마추어가 보더라도 이는 우연의 일치일 수 없다.

언어학자들은 그의 이 발표를 비교언어학의 시작이라 본다. 이들은 훗날 연구를 통해 지금은 사라진 터키 일대의 히타이트어, 중국 북서부의 토차리언어를 비롯, 라틴계, 게르만계, 켈틱계, 발트-슬라브계, 인도-이란계, 아르메니아계, 그리스계, 알바니아계 언어가 모두 같은 조상에서 나온 것을 밝혀냈다. 지금 전세계 인구가 80억인데 이 중 30억이 인도 유럽계 언어를 쓰고 있다. 영어도 물론 이 중 하나다.

흥미로운 것은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 널리 퍼지면서 이들 언어들간에 많은 차이가 발생했지만 말과 관련된 단어들은 공통의 뿌리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어로 말과 관련된 것을 뜻하는 ‘equine’, 포장마차를 뜻하는 ‘wagon’, 바퀴와 그 축을 뜻하는’wheel’과 ‘axle’은 인도 유럽어에서 공통의 어근을 갖고 있다.

언어학자들은 원 인도유럽어 사용자들이 기원전 4천년경 흑해와 카스피해 북부 지역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말이 처음 길들여진 시기와 장소와 일치한다. 지금 인도 유럽어가 전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은 말의 공이 크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말은 또 한번 세계 역사를 바꿔 놓는다. 북방 유목 민족 중에서도 몽골족은 어린 아이 때부터 말타는 것이 생활화 돼 있다. 거기다 몽골 말은 크기는 작은 편이지만 힘과 지구력이 강해 먼 거리를 지치지 않고 달리고 추위와 더위도 잘 견딘다.

이런 말과 몽골 민족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뛰어난 지도력을 통해 세계를 지배한 인물이 징기스칸과 그 자손들이다. 몽골 기병수는 전성기 때도 총 10만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기반으로 인구 1억의 송을 비롯 폴란드까지 침공하고 러시아와 페르샤, 아랍 왕조를 멸망시켰다.

새해는 붉은 말의 해다. 붉은 말 가운데 가장 유명한 말은 적토마다. 이 말의 원주인은 동탁이었지만 여포한테 넘어갔다 조조의 차지가 되고 결국은 관우가 그 주인이 됐다. 같은 말이지만 동탁과 여포 밑에 있을 때는 학정과 악행을 일삼는 도구가 되고 관우 하에서는 충절을 실천하는 수단이 됐다. 붉은 말의 기운이 넘치는 한 해라도 이를 어떻게 쓰느냐는 결국 사람에게 달려 있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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