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의 물건

2017-04-18 (화) 나리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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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아하는 것들이 참 많다. 브람스와 베토벤, 구스타프 클림트를 좋아한다. 클림트 그림의 꽃과 그의 따뜻한 색감을 좋아한다. 감동이 있고 웃음이 있는 줄거리와 배경이 되는 음악이 있는 영화를 보면 흥분한다.

나는 강아지도 좋아한다. 강아지가 너무나 좋아서 결혼도 하지 않고 수의사가 되어서 강아지들을 데리고 살려고 했지만 학력고사 성적이 너무 좋지 않고, 수의대에서는 뱀 같은 양서류도 공부해야 한다고 해서 포기했다. 특이한 곳으로의 여행 또한 좋아한다. 그래서 런던 베이커 가의 셜록홈스의 집을 방문했을 때 너무 좋아서 내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런 나의 다음 여행지는 괴물 네시가 산다는 영국 네스 호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책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의 시작은 책이었다. 강아지를 좋아하게 된 것도 강아지 백과사전을 통해 강아지를 더 많이 알았기 때문이고 영화가 감동인 것은 그 숨은 이야기와 배경음악에 대한 내 머리 속의 잡다한 지식을 검증하고 그 안에 숨겨진 재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 백과사전을 통해 만난 공룡이 살고 있다는 네스 호는 그래서 나의 꿈의 여행지다.


화책을 통해 알게 된 콩코드 여객기를 타고자 유치원 때 마음을 먹었고 나이 40 넘어서 Intrepid Museum에서 콩코드를 직접 봤을 때의 그 감격은 아직도 잊질 못한다.

'남자의 물건'이라는 책을 쓴 김정운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물건이란 자신의 삶을 얘기하게 하는 매개체라고 했다. 그래서 나에게 '당신의 물건'이 무엇이냐 물으면 '책입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책이 나에게 이런 의미 있는 물건이 된 것은 아마도 부모님의 영향 같다.

어릴 때 길 건너 책방에 같이 가서 책을 사 주시던 아빠,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은하철도 999 백과사전'같은 쓸데없어 보이는 책도 흔쾌히 사주시던 엄마. 책과 사유에서 얻으신 해박한 지식으로 나에게 지적 자극을 주시던 아빠. 추리소설, 하이틴로맨스 같은 수준 높은 책이 아니더라도 책을 사고 빌리기 위해 용돈을 넉넉히 주시던 엄마.

책과의 만남에는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다. 그래서 책이 지금도 좋은 것 같다. 그런 책을 읽고 얻은 지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에 숨은 아름다움을 아이에게 이야기하느라 요즘 잔소리할 시간이 없다. 잔소리가 없으니 아이도 엄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사춘기 아이와 눈을 맞춰가면서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은 아무에게나 오는 행운이 아니다. 날 알고 날 사랑하며 내 삶을 얘기해 줄 수 있는 ‘나의 물건’을 올봄에는 찾아보면서 모두들 각자의 물건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이 깃들기를…

<나리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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