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낮은 자세로 살아가기

2017-04-08 (토)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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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성정(性情)에는 남에게 굽히기 싫은 자존감 혹은 자존심이 있다. 자존감은 본성에 가깝다. 이런, 굽히기 싫어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교양이 있는 어른들 뿐만 아니다. 어린아이들에게도 있다. 그런데 이런 자존감은 사람이 성장할수록 더욱 더 가세되고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자존감에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다.

자존감을 마다하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 그리 흔하지 않다. 노자의 도덕경 22장 익겸(益謙) 포일(抱一)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다투지 아니하는 부쟁지덕(不爭之德)으로 자신을 온전하게 하고 자아를 굽혀 남의 아랫자리인 하위(下位)에 머무른다. 비굴한 패배자라고 비난받을지 모르나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승리의 길(道)이 된다.”

철학이 담겨있는 도덕경엔 이런 말들이 자주 나온다. 제자들이 노자에게 생존의 비결을 물었을 때 노자는 굳셈의 이빨이 되기보다는 연약한 혀가 되라 한다. 또 직선적인 인간이 되기보다는 곡선적인 인간이 되라한다. 그의 철학은 모든 것에 무리하지 않는 것이 인생태도의 근본이며 먼 길을 돌아갈 줄도 알아야한다, 가르친다.


부부사이, 부모와 자식사이, 직장 상사와 동료사이, 친구와 친구사이 등 모든 대인관계에서도 부쟁지덕과 하위의 철학은 통한다. 남편은 남편, 아내는 아내대로 자존감을 서로 버리고 아랫자리에 서기를 원하면 가정에 왜 문제가 있겠는가. 이혼의 가장 큰 사유 중 하나가 성격차이라는데 이것의 뿌리를 찾아가면 결국 자존감에 있다.
자존감을 굽히면 자신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자기주장을 굽힐 줄 아는 자는 언젠가는 그 주장이 받아져 이루어질 날이 옴을 본다. 구부러진 나무는 수명을 보전하여 안전하게 할 수 있다는 말, 헛말이 아니다. 곧은 나무는 금방 베어져 목재로 쓰이니 그렇다. 폭풍우속에서도 머리 숙일 줄 아는 갈대는 살아남는다.

낮은 자세로 살아가는 길은 자기 자신의 의지와 의견까지 무시하고 야합을 하라는 건 아니다. 비굴 하라는 것도 아니다.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거다. 겸손의 미덕.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스라엘에 가면 좁은 문이란 게 있다. 그 문은 절대 고개를 들고는 들어갈 수 없게 좁고 작은 문이다. 겸손, 낮아지기를 배우라는 거다.

<장자>의 외편 13장 천도(天道)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제왕의 덕(德)이란 천지(天地)를 근본으로 삼고, 도덕을 중심으로 알며, 무위(無爲)를 변함없는 도(道)로 여긴다. 무위이면 천하를 뜻대로 움직여도 마음에 여유가 있지만, 유위(有爲)이면 천하의 일에 쫓기어 마음에 흡족함이라는 여유가 없다. 그래서 무위를 귀하게 여겼다.”

장자의 무위사상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꾸밈없이 사는 지혜라 풀이할 수 있다. 사람이 자연의 일부임을 알고 자연과 더불어 자신을 낮추어 살아가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도 말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게 무위자연사상이다. 낮아지는 자, 마음에 여유로움이 있다.

도덕경(道德經) 66편, 강해(江海) 후기(後己)에 보면 “큰 강과 넓은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냇물을 모은다. 성인(聖人)은 민중 앞에서 항상 머리 숙여 겸손하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얻는다”는 말이 있다. 바다 같은 성인. 성인 같은 바다. 모든 걸 받아 품어주는 낮은 곳에 위치한 존재들이다.

상대방 운전자가 가운데 손가락 치켜들고 째려본다. 그냥 지나치는 거다. 여기서 자존감 내세우고 같이 가운데 손가락 치켜들어 싸움 붙으면 누가 손해인가. 자존감. 쓰레기처럼 버리는 거다. 아내가 “여보, 변기에 앉아서 소변보세요!”하면 앉아서 소변보는 거다. 이렇듯 낮은 자세로 살아가기, 다 가정의 화평을 위해서다.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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