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탄핵과 국기(國氣)

2017-02-18 (토) 장지윤/전직 교수
크게 작게
한 성현에게 이웃에 사는 농부가 고견을 듣고자 찾아와, 하소연 하기를, “옆집에 사는 제 사촌이 말을 키우는데 밤마다 그 말들을 풀어놔 제집 밭에서 키우는 채소를 다 뜯어먹게 합니다. 그래서 높은 울타리를 둘러 놨지요. 헌데 이젠 밤마다 몰래 와서 그 울타리를 허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촌을 재판소에 끌고 가려 합니다. 제가 이래야 마땅할까요?” 성현은 대답했다, “아무렴, 그래야 마땅하지.”

다른 사촌이 또 성현을 찾아와 하소연했다. “밭에서 채소를 키우는 제 사촌은 자기 땅에서만 농사를 짓지 못하고 제 땅 안에 들어와 식물을 심으니 우리말들이 그걸 뜯어 먹을 수밖에요. 하, 그런데 하루는 제 땅 안쪽에다 말뚝을 박고 울타리를 쳐 논게 아닙니까? 이런 몰염치한 인간을 사촌이라고 놔두고 봐야만 합니까? 그래서 저는 그 울타리를 죄다 뜯어 놨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법정에 가려 합니다. 제 말이 글렀습니까?” 성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네 말이 옳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옆에서 듣고 있던 제자가 말했다, “성현님, 이쪽도 옳다, 저쪽도 옳다, 하시는데, 이쪽은 옳고 저쪽은 그르다 이렇게 하셔야지요, 어쩌자고 이것도 저것도 다 옳다고 하시는 겁니까? 저는 양쪽이 다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성현이 제자를 한참 바라보더니, “네 말이 과연 옳구나” 했다.


요즘 미국의 심리학계서는 “당신은 옳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행복하기를 원하는가?”란 말이 유행한다. 미국의 인기있는 여성 극작가 ‘라빈 에이머스 카안(Robin Amos Kahn)'는 같은 제목으로 지난 2016년 8월4일자 Huffington Post에 쓴 글 때문이기도 하다.

허나 옳기를 바라는 욕망에서 생기는 인간관계의 문제에 관해서는 부처(Buddha)가 된 네팔의 왕자 싯달타가 기원전6세기에 이미 다룬 바 있다. 즉, '옳기를 바라는 욕망에서 벗어남으로써 얻게 되는 자유'-The Freedom of Not Needing To Be Right-설파했다.

이로 부터 약 2400년 후 19세기 독일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렇게 외쳤다.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길을 갖고 있습니다. 옳은 길, 바른길, 또 단 하나의 길에 관해 언급하자면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you have your way. I have my way. As for the right way, the correct way, and the only way, it does not exist-friedrich nietzsche)

‘내가 옳아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또 불완전한 자기 자신 또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마음의 평화와 조건 없이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이론은 오늘날 심리 분석학자들의 소파 위에서, 노동분규나 이혼상담소에서, 특히 심리학자 Dr. Phil(McGraw)의 TV쇼를 통해 많이 보급되고 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촛불 대 태극기의 대립은 일가친척이나 친구사이에 언쟁과 불목을 일으키고 있다. 양쪽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옳다”는 집착이겠다. 그래서 모두가 불안하고 초조하고 걱정이 많다. 필자 역시 한국의 이 림보 상태가 하루 속히 끝나기를 바라 초조한 마음이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620년전 중국의 노자는 이런 말을 우리에게 남기지 않았던가:

“자연은 성급히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모든 일을 성취시킨다.”(Nature does not hurry, yet everything is accomplished-Lao Tzu). 또 미국서 애용되는 말 중에 ‘Let Go, and Let God’ 란 말이 있다. 의역해 보자면 “당신이 아집을 벗어버릴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주의 힘을 빌어 당신을 도울 것이다.” 이것은 노자의 말을 다른 말로 풀이한 것 같다.

지금 한국의 정세는 과거와 크게 다를 게 없다. 대별해서, 권력은 부정과 부패를 낳고, 정경유착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인권유린과 소수의 다수착취는 구조적 부산물이고 기득권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정의와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시위는 정권의 억압과 저지로 민주주의의 갈망은 구호에 그치고, 젊음과 기존의 대치는 젊음의 희생을 낳는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정권의 부정부패는 탄핵으로 번졌고, 대중은 촛불과 국기로 맞섰다. 폭력이나 강압은 따르지 않았다. 시민항거는 법과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권리와 의무를 책임있게 다루는 절제를 보였다. 이런 변화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본다. 첫째, 과거 20여년 사이의 한국은 국제화와 경제발전을 통하여, 알게 모르게 국민의 시야를 넓혔고 일반인의 식수준이 높아졌다. 따라서 경찰이나 안보체제 구성인들 역시 교육수준과 전문성 역시 높아졌을 것이다.

보다 더 중요한 다른 하나의 이유는, 이제 치부를 다 드러낸 대한민국의 정치의 부정부패는 국민들로 하여금 더 이상 이런 범죄가 이 땅에서 용납되지 못할 것이라는 결의를 빚어낸 데 있다.

탄핵과 국기를 겪은 우리 후대는 부모나 조상 등에 업혀 출세하거나, 인맥, 학연, 혈연, 출생지등의 끈끈한 이유로 이웃을 차별하고 배타하지 않는 시회, 견해의 차이를 존중하고 거기서 배우는 사회, 남의 희생으로 내가 잘되기를 거부하는, 나만이 옳지 않고 남들도 옳은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민주주의 아래 만민이 자유, 평등, 평화의 부강한 동방예의지국에 이제 동트고 있음을 알고 기다릴 수 있다.

<장지윤/전직 교수>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