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단종의 자규시를 읽으며

2017-02-17 (금) 김갑헌/ 맨체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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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응접실에는 몇 폭의 그림이 걸려 있다. 중국에 갔을 때 가져온 어느 북한 화가의 그림 묘향산도와 중국 묵화 매화도, 그리고 어느 한인 화가가 삼십여 년 전에 그렸다는 붉은 매화도가 그 것이다. 단종이 퇴위하고 영월로 유배된 후 남긴 시가 매화도 위에 가로로 쓰여 있다. 자규시로 알려진 이 시는 어린 단종이 죽기 전에 남긴 두 편의 시 중의 하나라고 한다. 실증을 잘 내는 나의 조급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들이 제 자리를 지킨 것이 거의 이십년이다.

“두견의 소리 끊어진 새벽녘 기슭 기우는 달빛마저 퇴색해 가는구나, 붉은 피처럼 흐르는 봄 골짝의 저기 저 꽃잎들, 저기 저 꽃잎들 붉게 타네.” (황병국 역)

지난주에 내린 눈이 아직도 깊다 또 그 위에 비취는 달빛이 더욱 차갑다. 눈이 깊으면 봄이 이웃에 와 있다던 어느 영국 시인을 생각하며, 눈 속에 숨어 있을 봄의 깊이를 다시 한 번 가늠해 본다. 눈 속에 잠겨있는 앞뜰의 늙은 홍매화도 이제는 봄을 느끼는지 벌써 꽃 몽우리를 내밀고 있었다. 이제 곧 붉은 매화꽃이 만발 할 것이다. 그리고 열흘이 못가서 꽃들은 다시 질 것이요, 핏빛 같던 홍매화를 바라보던 단종의 슬프던 마음을 다시 한 번 읽어볼 것이다.


단종이 이 시를 쓴 후 열일곱의 어린 나이로 삼촌이 내린 사약을 거절하고 스스로 목을 매던 그 때가 지금으로부터 오백 육십년 전이다. 오백여 년의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으나 권력을 다투는 인간들의 싸움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 보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그 사람들에게도 피는 꽃, 지는 꽃이 피처럼 흐르는 것으로 보였을까?

계유정란을 전후해서 유배 되거나 처형된 인물들의 시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모두 충효시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불리는 시였다. 성삼문, 하위지, 유응부, 김시습, 왕방연, 조상치… 눈앞에 어른거리는 저 이름들은 눈 속에 서있는 매화의 절개와 어울리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충효 절개와 같은 덕목들이 쓰레기가 된 오늘에도 그 이름들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권력을 탐내는 삼촌과 어린 조카의 관계는 동양 서양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지난 정월 첫 두 주를 아내와 같이 여행을 했다. 네바다, 애리조나, 유타의 넓은 들이 모두 흰 눈으로 덮여 있었다. 작은 차를 몰아 천 마일이 넘는 길을 한가롭게 떠도는 자유로움은 복잡한 유럽 도시의 뒤 안에서 맛 볼 수 없는 특별한 경험 있었다. 유타주의 모압에서 70번 고속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달리다가 엘시노어 (Elsinore)라는 도시 표지판을 보고 섹스피어 (Shakespeare)를 생각했다.

엘시노어… 햄릿(Hamlet)의 배경으로 나오는 성이 아닌가? 두 해전 여름 아내와 덴마크 여행을 하면서 그 성에 들렸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황량한 유타의 사막 가운데에 엘시노어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19세기 초 유타에는 광산 붐이 일었다고 한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이 광산지역으로 몰려들었고 이 사막 가운데 광부들의 유일한 오락은 노천 가설무대에서 공연되던 섹스피어의 연극 햄릿 (Hamlet)이었다고 한다. 이 중요한 역사의 자료들이 아직도 엘시노어에서 멀지 않은 남 유타 대학교에 보존되어 있다.

단종의 슬픈 자규시, 셰익스피어의 햄릿(Hamlet), 라이온 킹(the Lion King) …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삼촌과 조카 사이에 일어났던 비극이었다. 권력이라는 힘의 실체를 놓고 싸웠던 제법 똑똑한 사람들의 어리석은 이야기들 이다. “살아야 할지 죽어야 할지” 그 실존적인 문제 사이를 방황하던 순진한 사람들이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인간들에 의해 짓밟히는 비극을 우리는 오래 오래 즐기고 있는 셈이다. 배신과 의리의 거리는 종이의 앞면과 뒷면 사이의 거리라고 한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정치판의 모습이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 같다. 벽에 걸린 단종의 눈물어린 시 한 수와 눈 속에 묻힌 앞뜰의 홍매화를 다시 바라본다. 엘시노어의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서 “살아야 할지 죽어야 할지”를 읊조리던 햄릿의 낮은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다.

<김갑헌/ 맨체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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