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월남 참전 50주년

2016-12-03 (토) 전태원 자유기고가
크게 작게
1966년 11월6일 오후 한 시경 맹호부대 6제대 장병들과 미 해군함 수송선에 몸을 실었다. 참전 만 50년이 되는 바로 날인 6일, 인천국제공항을 떠나 뉴욕행 여객기에 탑승을 해서 비통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정확히 세 번 죽을 뻔 했다. 시한폭탄 가설이 돼 있는 사고현장에 보고서 작성을 위해 두 번이나 출동했다가 목숨을 잃을 뻔 했다. 한 번은 소위 ‘부비트랩’ (살상용 건드리면 터지는 위장폭탄)이 터지면서 1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미군 나이트클럽에서도 살아남았다.

14개월의 병역의무 기간을 남긴 시기에 특수학교 교수부에 근무하고 있어 파월근무를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수임무 수행을 위한 파견 요청을 외면 할 수 없어 결행을 했었던 참전…


당시 나이 만26세, 국가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바로 적시에 그 요청에 응했던 당시의 패기, 애국심이야말로 곧 팔순을 바라보는 이 가슴에서 떠나질 않고 있다.6.25 북괴남침 때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희생된 미군 참전용사들과 미국정부에 보답하는 길을 마다해서는 안되겠다는 일념으로 한 몸을 던졌던 그 기억을 어찌 잊을소냐!

강원도 오음리에서의 유격 훈련도 면제받을 수 있는 신분임에도 자원해서 교육을 받았다. 교수부 전략정보학과 근무 16개월, 학과장의 간곡한 만류와 회유에도 이를 뿌리치고 국가의 부름에 응했던 당시를 회고하면서 50년 전 부산항에서의 함성소리를 귓전으로 듣는다.
그 후, 1972년 11월26일 뉴욕에 도착하기까지 만 6년간을 월남전에서 활약했다. 1975년 4월30일 월맹정규군과 베트콩이 사이공을 함락하기 까지는 눈 깜짝 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그렇게 사이공, 월남 정부군이 맥없이 쓰러지고 함락됐다.

미국정부가 철수 계획을 발표하고 미 대사관도 철수하기 직전에 지하 조직원들과 지역 베트공들이 궐기하고 공산주의 동조자들까지 가세하면서 월맹군 탱크가 미 대사관 앞을 돌진해서 대통령궁을 치고 들어가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린 게 얼마 전처럼 생생하다.

그 후, 월남공산국가는 현재의 김정은이 이끄는 북괴체제와는 현격히 다른 차원의 나라라는 걸 우리 국민들은 명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얼마나 많은 공직자들과 민주인사들이 숙청되고 처형되었는가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작금 최순실게이트, 국정논란으로 대한민국이 벼랑 끝에 서 있다.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동원해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 하야를 외치며 경찰측은 4만5,000명으로 추산하는데 주최측은 다섯 배에 가까운 20만 시위자들이 참여했다고 언론, 방송마다 호도하며 난리 굿판을 벌이는 현재 조국, 사이공 정부가 함락되기 바로 직전 상황을 목도하는 듯해서 소름이 끼치고 가슴이 메인다.

4주간 조국에 체류하면서 보고 느낀 거는 한국은 잘 먹고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거다. 든 게 휘황찬란하고 없는 게 없이 다 누릴 수 있는 지상천국이다.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도저히 눈으로 보고도 의심할 수밖에 없이 풍족한 삶을 구가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문제는 준법정신 박약아들로 자란 기성세대들이 장악하고 있는 정계, 학계, 종교계, 사회, 분야를 망라해서 정상인 보다는 비정상적인 다수가 지배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정계는 물론 학계, 법조계에다 종교인들까지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자들이 나라꼴이 이 지경에 까지 이르도록 좌지우지해 왔다는 걸 국민 모두가 인식해야 한다.

맹목적이고 고질적인 지역주의를 등에 업 날뛴 대통령들, 이에 기생해온 국회의원들 하며 지난 수십 년간 민주주의를 제창하면서 가장 비민주적 구태를 벌여온 정치인들이야 말로 대한민국 정치토양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나라가 바로 잡히고 설 것이다.

우리는 이 치욕스런 사실을 우리 잊어서도 안 될 뿐 아니라 뼈를 깎는 통찰과 성찰을 통해 과연 우리가 도탄에 빠진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되고 해서는 안 될 것인가를 새겨봐야 할 것 같다.

<전태원 자유기고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