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두 개의 숫자

2016-11-22 (화) 노려 웨체스터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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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의 눈

중요한 운동 경기가 있을 때 마다 신문 기사에는 스태디움에 모인 관중의 숫자가 ‘4만 5,687명’이라는 식으로 명시된다. 판매한 입장권의 숫자가 있으니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인파의 수를 나타낼 때에는 ‘4만 5,000명이 넘는다.’ 또는 ‘거의 4만 5,000 명’ 이라는 등 가장 근사한 숫치를 말해준다. 신문을 읽는 독자들은 경기엘 가질 않았어도 열띤 구장의 분위기를 잘 알 수가 있다.

대통령 선거 캠페인 때에도 미국 신문들은 Tens of Thousand 또는 Hundreds of Thousand라는 식으로 숫자를 말한다. 천개 씩 수십 개 또는 천개 씩 수백 개라는 건데, 2만인지 8만인지, 10만인지 50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한 수 만 명 또는 수십만 명 정도로 많이 모였다는 것이다. 숫자 계산에 약한 나도 신문지상에 표기되는 숫자를 보면서 행사와 사건의 상황을 판단하곤 한다.

그런데, 박근혜- 최순실 한국 뉴스를 보면서 기가 막힌다. 매번 촛불집회에 얼마나 모였을까 궁금한 독자들은 엄청난 차이가 나는 두개의 숫자를 보게 된다. 즉 경찰 추산, 주최측 추산이다. 경찰 측과 주최 측이 도입한 인파 숫자의 파악 방법이 암만 다르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니다 싶다.


월드 컵 때를 빼고는 이런 데모가 있을 때마다 번번이 경찰은 숫자를 줄이고 주최측은 숫자를 늘리고 하는 걸 보아왔다. 별일 아니라는 측과,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으니 중요한 일이라는 측의 대결 정도로 여겼다. 하긴 교회들도 자기 교인의 숫자는 갓난아기까지 합쳐서 불려 말하고 남의 교회에 대해서는 몇 가정 안 된다고 깎아 내리기 일쑤다. 이는 그만큼 현 사회에서의 숫자의 의미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경찰측 추산 ‘주최측 추산’라는 단어가 마치 중요한 공식이라도 되듯, 거의 4배나 차이 나는 두 개의 숫자를 당연한 듯이 나란히 알려주는 뉴스 미디어라는 생각이 든다.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인지.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라는 것인지. 과연 뉴스를 전하는 쪽에서의 주관은 없는 것일까. 정확성을 내세우는 뉴스 기관이라면, 기본적으로 인파를 계산하는 과학적인 방법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식 뉴스에 길들여지고 무뎌져서 의례히 그러려니 전혀 부담 없이 받아들이는 국민, 아니면 두개의 숫자 중에 자기가 좋은 것을 택하는 국민들도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매사를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따라서 알리고 싶은 대로 알리는 경향이 있음을 안다. 그래서 두 개의 숫자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너무나 엉뚱하게 다른 두 개의 숫자를 제시하는 일이 별로 큰일 아닌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우리 국민들이 앞으로 더욱더 경찰도 주최측도 못 믿고 나아가서는 그 아무도 믿을 수 없도록 하는 일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웨체스터에서 열린 집회를 취재할 때 나름대로 열심히 인원을 파악한다. 한 줄의 사람 수를 세어보고 총 몇 줄이나 되는지…서 있는 사람이 있는지 빈자리가 있는지를 살펴본다. 그것이 어려울 땐 그저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약간 명이 모였다.’라고 쓴다. 어떨 때는 한 90명 좀 넘지만 ‘거의 100명’이라고 쓰기도 했다. 가능하면 정확한 인원을 알리는 것이 기자의 의무라고 여기고 있다.

하긴 몇 퍼센트의 오차가 있는 갤럽조사에서 나온 대통령 지지율 숫자만으로도 지금 거의 전 국민이 자괴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촛불 데모 인원의 숫자 따위는 별 의미가 없는 것도 같다.

<노려 웨체스터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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