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하야(下野)’. 하야(chayah)’

2016-11-21 (월) 연창흠 논설위원
크게 작게
1960년 4월 26일 오후 1시 이승만 초대 대통령.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중략)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1962년 3월 22일 오전 11시30분 윤보선 대통령. “나는 대한민국 앞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것을 성명하는 바입니다. 원래 덕이 없는 이 사람이 국가원수 직에 있었던 1년 8개월 동안 이 나라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해서 나는 그 책임을 느끼는 바입니다”

1980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 “나는 책임정치 구현으로 불신풍조를 없애고 불행했던 우리헌정사에 평화적인 정권이양의 선례를 남기며, 국민모두가 심기일전하여 화합과 단결을 다짐으로써 시대적 요청에 따른 안정과 번영의 밝고 새로운 사회건설이란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고자 애국충정과 대국적인 견지에서 나 자신의 거취에 관한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나는 오늘 대통령의 직에서 물러나 헌법의 규정에 의거한 대통령 권한 대행권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짧은 헌정사에도 불구하고 세 차례나 대통령이 물러나는 사건이 있었다.
가장 먼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그는 독재를 위해 부정선거를 했다. 그 결과 4.19 혁명이 일어났다.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가진 수많은 국민이 격렬하게 시위했다. 불법 부정에 항거한 국민의 요구에 대통령은 무릎을 꿇었다. 대통령직에서 스스로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이 민의에 의해 하야 했다면 윤보선과 최규하 대통령은 군부세력에 쫓겨났다. 윤 대통령은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세력에 의해 실권을 상실하고 하야했다. 최 대통령 역시 12.12 군사반란과 4.17 내란 이후 신군부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미국에서도 하야한 대통령이 있다. 바로 리처드 닉슨대통령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전 국민적 신임을 잃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프랑스 대통령도 있다. 샤를 드골대통령이다. 독재를 펼치다 결국 시민들의 압력으로 하야했다.

하야(下野)는 원래 시골로 내려간다는 뜻이다. 관직이나 정계에서 물러난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일반관직엔 사용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물러날 때 하야라고 쓴다. 국무총리나 장관 등 고위직 공무원이 그 직에서 자발적으로 물러날 때는 사퇴라 한다.

2016년 11월 18일 현재.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게이트 여파로 강력한 하야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스스로 물러날 기미는 전혀 없는 듯하다. 아니 ‘막다른 길’에서 ‘버티기’도 아닌 ‘공격태세’다. 아마도 임기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성난 촛불 민심이 ‘조건 없는 퇴진’에서 ‘탄핵’을 촉구하는 이유다.

하야와 탄핵은 모두 둘 다 현직에서 물러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하야는 보통 자신이 국정을 책임질 능력이 없을 때 이루어진다. 전 국민적 반대로 인해 더 이상 국정을 담당할 자격이 없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군사 쿠데타가 발생해 실권을 사실상 상실하고 명목상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을 때도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반면 탄핵은 대통령이나 고위직 공무원이 위법 행위를 했을 때, 법률에 정한 절차에 따라 법적인 구속력을 갖고서 그 대상을 파면하는 제도다. 현재까지 한국에서 탄핵된 대통령은 없다. 고 노무현 전직 대통령이 국회의 의결로 탄핵소추까지 됐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에서 각하 결정을 내려, 해프닝으로 막을 내린 적은 있었다.

여하튼, 하야든 탄핵이든 아니면 하야 의사를 밝힌 후 ‘단계적 퇴진’ 시나리오를 쓰든, 대한민국의 혼란정국은 하루 빨리 수습돼야 한다. 히브리어 하야(chayah)는 주로 ‘부활’이나 ‘소생’의 뜻으로 번역된다. 부활은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소생은 혼미상태에서 벗어나 깨어난다는 의미다. 지금 우리조국이야말로 하야(chayah)의 의미인 ‘부활’이나 ‘소생’이 필요한 상황이다.

<연창흠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