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방색과 `창조’

2016-11-04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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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에 연관된 박근혜 대통령이 권위와 신뢰를 잃어버리면서 요즘 대중문화계에 대거 등장한 패러디물에 ‘우주의 기운’, ‘오방낭’ 이란 말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먼저, 음양오행설에 대해 알아보자. 음양(陰陽)설은 주역에 나오며 인간의 모든 현상을 음양 두 원리로 설명하고 오행(五行)설은 우주만물을 형성하는 원기(元氣) 즉, 만물의 생성소멸을 목ㆍ화ㆍ토ㆍ 금ㆍ수의 변천으로 설명한다.

고대중국의 음양설과 오행설은 발생을 달리 하나 전국시대 말기 이후 ‘융합’되어 음양오행설이 되었다. 이 음양오행설은 삼국시대때 학문 분야가 아닌 방술로 들어와 세속화 되고 민간에 전해져 신앙, 건축, 의식 등 문화에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날 색동옷, 단청, 색동무늬로 남았다.

이 오행사상을 상징하는 색을 오방색이라 하며 방(方)이라는 말은 각각의 빛들이 방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파랑은 동쪽(나무), 빨강(불)은 남쪽, 노랑(흙)은 중앙, 하양(쇠)은 서쪽, 검정(물)은 북쪽을 뜻한다. 나무를 태우면 불이 나고 불이 탄 곳에서 흙이 생기고 흙이 뭉쳐 돌이 되고 돌 사이에서 맑은 물이 나오니 이를 상생이라 한다. 오방색은 골고루 있는 것이므로 복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오방색 조각보로 만든 주머니가 오방낭이다. 이 ‘오방낭 프로그램’이 최순실의 PC에서 발견되어 박대통령 취임식 행사도 최순실의 개입이 드러났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날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희망이 열리는 나무’ (오방낭 복주머니) 제막식 행사가 있었다. 박대통령은 파랑, 빨강, 노랑, 검정, 하양색이 오방에 따라 배치된 오방낭 조형물을 직접 열고 이 나무에 매달린 오방낭 수백개를 청와대로 가져갔다.

무속인들은 우주의 기운을 모은 이 오방색 복주머니가 우주와 인간을 잇는 기운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무당이 모시는 당산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신령 깃든 나무로 이곳에서 매년 중요한 절기에 마을의 복을 비는 굿을 한다. 오래전 한국 시골에 살았던 나이든 사람 중에는 당산나무 밑둥에 흰 천이 감기고 나무둘레가 금색 때로는 울긋불긋한 헝겊이 길게 걸려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당산 자체가 우주의 중앙이었고 하늘과 지상을 잇는 매체였다.

새삼, 취임식 사진을 보면서 이 ‘희망이 열리는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복주머니를 본 순간, 왜 일본계 미국인 참여예술가 오노 요꼬(1930~ )의 ‘희망의 나무’가 떠오르는지? 박근혜 정부 누군가가 해외에서 오노 요꼬의 전시회를 보고 ‘창조’(Creative)가 아닌 ‘복사’(Copy)한 것은 아닐까 싶다.

요꼬의 작품 ‘희망의 나무’는 나무 옆에 새하얀 종이쪽지들이 비치되어있고 프린트로 된 지시문이 부쳐져있다. 1996년 지시문에 기초하면 ‘소망을 비시오/ 종이위에 소망을 적으시오/종이를 접어서 소망나무에 거시오’ 라고 되어있다. 본인도 맨하탄 모마에서 열린 요꼬의 ‘희망의 나무’에 당시 간절히 바라던 것을 적어서 쪽지 끝에 달린 흰 실로 나무에 매단 경험이 있다. 그녀는 세계 평화를 위해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데 박대통령은 누구를 위해 우주, 혼, 기운이 담긴 복주머니를 청와대 어느 방으로 가져갔을까?

정작 무당들의 단체인 무신교연합회는 최순실이 사이비라면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한다. 이 오방색이 우리 전통색으로, 무속신앙 속 무형문화재로 남아있으면 그만큼 ‘독창적’인 것도 없지만 정부기관 상징 로고에 등장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동안 박근혜 정부는 오방색 한복과 패션전을 한불수교 130주년을 맞아 프랑스 장식박물관에서 개최한 것을 비롯 오방색과 아트, 한식의 조화 등 각종 이벤트로 오방색을 세계 각국에 홍보해 왔다.

또 박근혜 정부가 새국가 브랜드로 내세운 ‘크리에이티브 코리아’ 즉 창조한국, 창조경제, 문화창조융합벨트 라는 것이 있다. “ 창조경제는 과학기술과 산업이 융합하고, 문화와 산업이 융합하고....융합의 터전 위에 새로운 시장,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고 했는데 3년 8개월의 국정 끝에 남은 것은 국민의 의혹과 분노뿐이다.
더불어 그 좋은 ‘창조’, ‘문화’, ‘융성’, 이 단어들이 부끄러워 당분간 쓸 수 없게 되었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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