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커네티컷/ 칼럼:아버지의 표창장

2016-11-04 (금)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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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게 찾아 온 첫눈이 가을의 기억을 덮으며 겨울을 재촉하고, 나무는 마지막 춤사위로 어지러운 세월을 온 몸으로 털고 있다. 한 해의 끝자락을 드러낸 달력도 아롱다롱 수채화를 지우고 가로수 외로운 그림자로 서서 두 계절을 쓸쓸히 바라보고 있다.

몸을 가누지 못 하게 바람에 휘둘리는 늙은 나무를 바라보다가 불현듯 오래 전에 우리 곁을 떠나신 친정아버지를 기억한다. 아버지는 사범학교를 나오시고 20년 넘게 교편생활을 하시었다 동네에서는 멋쟁이로 통했는데 특히 할머니들에게서 후한 점수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의 멋은 유행하는 넥타이라고 증명하듯이 수없이 많은 넥타이를 소장하시고 가끔씩 속아내어 할머니들의 몽실한 허리춤에 묶어 드리면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훌륭한 허리띠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내 어렴풋한 기억은 선생님이 지나 가면 동네에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도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하고 극진한 존경심을 표현했었다. 그 아름답던 모습들이 지금은 구습처럼 취급 받고, 걱정이 앞서는 교육현장이 되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아침 조회시간에는 상급생이 운동장으로 밀고 나온 풍금에 앉아 애국가를 반주하시던 모습이 그립다. 그런 멋쟁이 아버지는 월급날이면 노란 봉투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반 봉투가 되길 서슴지 않았고, 가족보다 자식들보다 우선이 제자사랑이셨다.


오죽하면 엄마는 제대로 된 월급봉투 한번 내 손에 쥐어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셨을까.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이나 그 친척들의 일까지 참견하시고 해결사 노릇을 자처하셨으니 귀가시간은 항상 통금직전이었다. 제자들은 상급학교도 척척 합격하고 보니 어떤 학부모는 방망이에 탱자나무 가시를 붙여 와서 이것으로 내 자식을 때려서라도 올바른 사람을 만들어 달라고 애원했던 일화가 있었으니,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승에 대한 부모의 신뢰가 존경스럽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던 아버지에게 도시 바람이 불었으니 돈이 문제였다. 귀가 얇은 아버지는 친구의 달콤한 말에 넘어 갔고 큰돈을 벌어 일가친척까지 잘 살게 해보겠다고 학교를 그만 두시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가의 기질이 전무하고, 세상물정에 까막눈인 아버지는 계속해서 속임을 당하고, 남의 탓도 할 줄 모르니 그로 인해 식구들은 난파선처럼 세상풍랑을 막아 내느라 생긴 상처는 오랫동안 쉽게 아물지 못했다. 어느새 성년이 되고, 사회에서 성공한 제자들이 번갈아 찾아와서 위로를 해주고 어려운 경제적 형편도 해결해 주곤 했으니 부족한 가운데서도 보람을 느끼며 행복해 하셨다.

그 날도 아버지는 우리가 잘 모르는 사업파트너를 만나러 나가셨는데, 석양을 등지고 간신히 집으로 귀가하셨을 때는 안구가 돌출되었고 입이 삐뚤어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후에 잦은 병치레가 시작되었고 요즘처럼 찬바람이 불면 외출을 안 하시고 웃 목에 밀어둔 사각교자상을 벗 삼아 시간을 보내셨다.

교과서 크기 만한 다이어리와 만년필 그리고 배가 볼록한 커다란 돋보기가 지켜주는 교자상을 밀었다 당겼다 하시면서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 또 적으셨다. 내가 지금 꼼꼼히 메모를 해두고 부족하나마 작문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모습을 훔쳐보며 은연중에 물려받은 유산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 후로 몇 개월의 병원생활이 마지막 장막이 되었고 바람이 매섭던 그 날에 영원한 나라로 이사하셨다. “이 이는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평소에 그 직무에 정려하여 공적이 뚜렷한바 있으므로 포장령 제4조에 의하여 이 장을 드리어 길이 표창함. 단기 4293년 0월 0일 대통령” 책장 귀퉁이에 돌돌 말아 고무줄에 묶인 채로 몇 십 년을 침묵하던 아버지의 유품을 동생이 잘 간직하게 되었다.

시국이 어수선한 이때에 나는 왜 아버지를 기억하는지 알 수 없지만 살아 계셨을 때 자랑스럽게 여겨 드리지 못한 안타까움, 밖에서는 인정받으셨으나 집안에서 무명인 이셨던 아버지께 가족의 이름으로 표창장을 올려 드린다.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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