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아, 반갑다.

2016-10-08 (토) 민다미 갤러리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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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 가을이 왔다. 아이는 학교에 다녀오면 책가방을 내려놓고 맨 먼저 지하실로 향한다. 10명은 족히 들어갈 커다란 비치용 텐트를 펼쳐놓고, 자기가 아끼고 좋아하는 책과 물건들을 잔뜩 챙겨 자신의 비밀요새라며 성실하고도 굳건하게 점검하고 지킨다. 조금은 어둡고 비좁은 공간이지만, 덕분에 가장 아늑하고 따스한 그곳을 매일매일 찾아가 책도 읽고, 이야기를 만들어 직접 책을 만들기도 한다.

어느 날, 학교에 다녀온 아이가 지하로 향하더니 소리쳤다. “엄마, 내 비밀요새에 손님이 왔어요.” 순간 누군가 우리 집에 몰래 들어왔다는 말인 줄로 착각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다, 제법 큰 소리로 울어대는 그 손님 녀석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두려움은 미소로 바뀌었다. 그렇다. 아이의 비밀장소에 여름이 지나 찾아 온 첫손님은 엄청나게 큰 목청으로 울어대는 귀뚜라미였다. 아이는 신나서, 보이지도 않고 목소리로만 방문을 알리는 그 귀한 손님을 위해 좋아하는 음식과 생활습성 등을 알기 위해 열심히 책을 찾아보고 인터넷을 검색했다.

귀뚜라미는 귀가 얼굴이 아닌 다리에 있고, 암컷은 짝짓기 후 바늘같이 긴 대롱을 땅속에 넣고 알을 낳으며 가을에 낳은 알은 봄에 나온 후 5번의 허물을 벗고 다 성장한 귀뚜라미가 되어 가을에 노래하며 싸움을 하거나, 암컷을 부를 때도 소리를 낸다고 한다. 가을에 알을 낳은 어미도 울 것이고, 완전한 성년의 귀뚜라미가 자신도 멋지게 잘 자랐노라고 울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폭염이 지속되면 부화가 빨라져서 가을이 무르익기 전에 울기 시작하고, 신체활동 반응과 함께 울음소리의 간격도 빨라져서 더 시끄럽게 들린다고 하니, 올 여름 유난했던 더위가 가을손님이 일찍 찾아온 이유일 것이다.

집안에 새로운 손님이 온 이후로 우리 집은 온통 가을이다. 조용히 앉아 책을 읽을 때도, 가랑비에 옷 젖는 듯 슬며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쌀쌀한 가을바람에 따뜻한 차를 마실 때도, 학교 다녀 온 아이의 비밀스러운 회동의 자리에도, 저녁식사를 마치고 두런두런 둘러앉아 하루일과를 나누는 가족의 시간에도 그 손님은 여전히 울어대며 가을을 알리고 있다.

어떤 친구는 우렁차게 종일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를 줄이는 방법이라며 조금은 잔인하게도 날개를 떼어내라는 무시무시한 조언을 하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그 맑고 순수했던 때를 함께 나누기도 한다. 귀뚜라미에 대한 생각 하나로 마음이 더 잘 통하는 친구를 알게 되는 순간도 찾아오니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손님이 우리 집과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작디작은 미물에 대한 생각 하나로 친구의 성향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정말 어리석고 유치하기 짝이 없기도 하지만 한 대상을 두고 공감대가 형성되는 순간 절대 털어놓지 못할 비밀도 얘기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단단해서 허물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마음의 벽도 한순간에 무너지고, 최면을 걸어야만 할만큼 머나먼 시간속의 옛 기억도 떠올라 함께 나누게 되었다. 창밖에선 오래도록 푸르기만 하던 초록의 나무들도 울긋불긋 우아하고 성숙한 색의 옷으로 바꿔 입고, 새벽에는 차가운 공기가 낯설어 얼굴까지 한껏 끌어올린 포근한 이불 속에서 계속 웃어본다.

마음을 나눌 친구가 참 많아서 이 가을도 쓸쓸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모두가 곤히 잠든 이 가을밤, 혼자 우두커니 앉아 듣고 또 들어본다. 그리고 말한다. “가을아, 너 참 반갑다.”

<민다미 갤러리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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