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랑스런 한글

2016-10-08 (토) 김해종목사ㆍ전연합감리교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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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맞이하는 한글날의 감명이 깊다. 우리나라 한글이야 말로 ‘ 민주주의 글자 ’ 라고 하겠다. 이는 모든 사람이 쉽게 배우며 모든 말을 다 표기 할 수 있는 표기법이기 때문이다. 근래 와서 한글의 우수성을 유네스코에서 인정 받았을 뿐 아니라 ‘영어제일주의’ 미국에서도 차차 알아주게 되었으니 놀라운 일이다.

본인이 12년 동안 (1992?2004) 연합감리교회 감독으로 있으면서 관장하는 연회의 (회원교회 500~1,000 교회) 미국인 목사들과 나의 ‘캐비넷’(각료회의) 멤버인 감리사들과 그 가족들과 함께 보통 30~40명씩 인솔하고 매년 한번씩 한국을 방문하였다. 10일간 한국을 관광시키며, 한국 교회를 소개하는 일을 한 것이다.

한국을 잘 모르고 처음 와 보는 그들은 모두 감탄을 연발하면서 방문을 즐겼다. 특히 감사했던 것은 당시 광림교회 담임목사였던, 나의 신학교 1년 선배 김선도 감독님이 갈 때마다 42인승 교회 버스를 기사와 함께 내어주어 마음대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버스 여행 중 앞자리에 앉아 ‘여행 가이드’ 역을 하면서 미국인 목사들에게 여러가지 한국 문화화 역사를 소개했다.


서울에서 경주로 가는 긴 여행에서는 내가 미리 준비한 한글 모음 자음 차트를 나누어 주고 5시간 가는 동안 한글을 소개하고 가르쳤다. 나는 “나에게 4시간만 주면 한글을 읽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모두 4시간에 한글을 깨친다는 말에, 나누어준 차트에 처음보는 이상스럽게 생긴 글자를 보며 의아해 했으나 호기심에 열심히 나의 가르침을 따랐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이 경주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는 한글 간판을 읽기 시작했고 자기들의 이름을 한글로 써 가지고 나에게 가져와 잘 썼는가 물어보았다. 나는 선생처럼 점수를 주어 가며 재미있는 한글공부 여행을 시킨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문맹자가 거의 없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바탕이다. 아이티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 이유도 과학적인 한글 자판의 영향이 크다는 것은 벌써 많이 검증된 사실이다.
이런 한글을 일제는 말살하려고 했지 않은가? 나는 해방되던 초등학교 4학년까지 학교에서 일본말만 배웠다. 집에서 어머님이 한글을 가르쳐주셨지만 밖에 나가서 쓰면 큰일 난다고 하셨다. 우리 말, 우리 글을 쓰지 못하던 시대! 해방후 학교에서 한글을 처음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 때는 좋은 ‘백지’ 종이도 없어 ‘마분지’ 라는 누런 종이에 석판으로 인쇄한 한글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했다. 아 그러나 우수한 우리나라 글을 배울 수 있는 감격은 컸다.
서울에 갈 때마다 세종로에 한글을 펴신 세종대왕의 동상을 보며 경의를 표한다. 나는 한글날에 감사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선각자 서재필 선생이다.

2014년에, 나의 모교인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에서 나를 객원교수로 초청하여 5개월간 서대문 에서 산 일이 있다. 나는 자주 가까이 있는 독립공원을 운동 삼아 산책했다. 그때마다 독립공원 입구에 서있는 서재필 선생의 동상 앞을 지나게 되었다. 코리안 아메리칸의 롤 모델인 서재필 선생의 서있는 동상, 그는 불끈 주먹을 쥔 바른팔을 높이 들고 있다. 그리고 그의 주먹에는 둘둘 만 독립신문을 쥐고있다.

1895년, 봉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계에서 뒤떨어지고 있는 조국을 개혁하겠다고 나선 젊은 서재필.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역적으로 몰려 삼족을 멸하는 가혹한 형벌을 받으며 혼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선진국 미국의 민주주의를 보고 조국에 그 사상을 전하고 싶어 하던 차, 망명 십년 후인 1895년 나라의 부름을 받고 돌아와 배재학당에서 가르치며 여러가지 개혁 운동을 했었다.

그가 1896년에 주시경 선생과 함께 독립신문을 순 한글로 발행하였으니 그는 과연 선각자였다. 하늘 향해 높이 든 그의 주먹에 쥐고있는 한글판 독립신문!
나는 오늘 이 두 분을 생각하며 마음 속으로 한글 만세를 부른다.

<김해종목사ㆍ전연합감리교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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