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생

2016-09-30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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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대하소설처럼 호흡이 긴 책을 찾게 된다.
지난여름 친구가 “요즘, 중국작가 위화에 빠져있다 ”며 위화가 쓴 책들을 잔뜩 주었다. 그 책 중에 소설 ‘인생’ (活着)이 있었다. 10년 전에 나온 책인데도 지난 9월 16일부터 22일까지 중국 최대의 온라인 서점 당당왕의 집계에 인생은 베스트셀러 3위안에 들어있다.

소설에서 푸구이 노인은 “얼시! 유칭! 게으름 피워선 안돼. 자전! 펑샤! 잘하는구나, 쿠건! 너도 잘한다.” 소 한 마리에게 일을 시키면서 수많은 이름을 부르는 노인이다.
“소가 자기만 밭을 가는 줄 알까 봐 이름을 여러 개 불러서 속이는 거지. 다른 소도 받을 갈고 있는 줄 알면 기분이 좋을 테니 밭도 신나게 갈지 않겠소.”그러고 시작된 노인의 살아온 이야기는 중국 현세사를 그대로 따라간다.

푸구이는 지주집 아들, 아내 자전도 미곡상 집 딸, 둘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지만 도박, 기생집 출입으로 전답을 모두 날리고 40세 나이에 소작인이 된다. 어머니가 아파 의원을 데리러 갔다가 국민당 군에 끌려가 전장에 나서고 거기서 전우 춘성을 만난다.


1958년 토지개혁이 시작되자 푸구이의 재산을 차지한 지주 룽얼은 죽임을 당한다. 달리기 잘하는 아들 유칭은 교장선생의 출산 과정에 수혈해 주다 피를 너무 뽑혀 사망하는데 알고 보니 교장은 전우 춘성의 부인이다. 문화대혁명이 거세지면서 매일 사람들이 죽어가고 춘성도 자살한다. 벙어리 딸 펑샤는 아기를 낳다가 과다출혈로 죽고, 아내 자전은 병으로, 사위는 사고로, 일곱 살 된 손자는 굶다가 한꺼번에 콩을 너무 많이 먹어서 죽는다.

모든 가족이 그의 곁을 떠난 어느 날, 푸구이는 한 마리의 소와 밭일을 하면서 실제로는 없는 소들에게 아내, 아들, 딸, 사위, 손자의 이름을 붙여 부른다. 평생 고통스런 삶을 살았고 혼자 남은 노인은 개인과 운명의 존재는 피할 래야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에게는 미움이나 원망이 없다.

위화의 소설 ‘인생’에 버금가는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가 있다. 6.26 전쟁 후 북한의 한 가족 이야기로 바리는 일곱명 딸 중 막내로 태어나 숲에 내다버려지나 흰둥이가 갓난아기를 제 다리 사이에 감싸고 돌봐 살아난다.

94년이후 남으로 간 외삼촌으로 인해 바리네 가정에 회오리바람이 분다. 아버지는 잡혀가고 엄마와 언니들은 다른 도시로 보내지고 할머니, 현이, 바리 셋은 강을 건너 중국으로 간다. 공화국 천지에 굶어죽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먹을 것을 찾아 밤이면 강을 건너는 탈북 무리들이 늘어간다. 할머니와 현이도 죽고 열세살 어린 바리는 연길로 가서 안마방 마사지사가 된다. 그곳에서 만난 샹언니를 따라 따렌을 거쳐 바다 건너 영국으로 흘러간다. 마치 해가 저무는 서천으로 생명수를 찾으러 떠나는 바리공주처럼.

16세에 낯선 땅의 불법체류자로 떨어져 유색인종이 모여 사는 동네의 연립주택 반지하방에 살며 마사지사로 일한다. 그곳 관리인 할아버지의 손자 알리를 만나 18살에 결혼한다.

2001년 9.11이 일어나고 테러를 저지른 자는 폭력주의자들이지 우리네 무슬림하고는 상관없다는 알리의 말과 달리 무슬림은 여러 곳에서 수난을 당한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고 실종되었던 알리가 관타나모 기지에서 풀려나 돌아오고 함께 샌드위치와 케밥 전문 가게를 차려 잠시 평온을 되찾은 듯 보인다. 그러나 지하철 테러가 일어나고 버스가 폭발하는 길 복판에서 부부는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린다. 세상은 여전히 불구덩이고 전쟁 중이다.

이같은 이야기는 주위에서 실제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푸구이 노인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었다. 아내, 아들, 딸, 사위, 손자 모두를 품에 안고서 여생을 보낸다. 즉 그가 살면서 겪은 행복과 고통, 좌절, 슬픔이 바로 그 자신이고 그의 삶이다.

바리는 ‘육신을 가진 자는 누구나 지상에서 이미 지옥을 겪고 미움은 바로 자기가 지은 지옥’이라는 알리 할아버지 말에 기다리고 견디는 삶을 받아들인다. 소설 ‘인생’과 ‘바리데기’를 읽고 나면 살아있는 주위의 모든 이들이, 지금 이 순간이 고마워진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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