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골목길

2016-07-30 (토) 전태원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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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나는 한번도 거르지 않고 한국을 방문한다. 특별히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고 단지 고국이 그립고 친구가 보고 싶어서이다.

내가 태어나 자라난 고향에는 아직도 나를 반겨주는 친구들이 있는 데 어릴 적에는 동무요, 청년기에는 동지였고 장년에는 막강한 버팀목들이 되어 준 친구들이다. 그렇게 죽어도 잊지못할 벗들이 있기에 고향 길은 항상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살던 옛날 우리집은 서울 같으면 명동거리처럼 번화가였는데 다른 지역은 다 개발이 되어 국제도시를 연상할 정도로 발전을 했지만 내가 자라며 컸던 우리 집 앞길은 옛날 그대로이라 그 앞을 거니노라면 70년 전 뛰놀던 옛 시절이 떠올라 감회에 젖곤 한다.


자동차가 많지 않았던 때라 당시는 가장 번화가요, 대로였지만 모퉁이만 돌아가면 아스팔트 길 위에다 마치 내 집 뒤 뜰인양 구멍들을 뚫고 댕구 치기도 하고 야구와 ‘찜뽀’도 하며 뛰놀던 우리들의 혼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만 열 살 되던 해에 북괴가 육이오 남침을 감행했고 그 이듬 해 1.4후퇴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배를 대절해서 아녀자들과 어린애들은 모두 우리 선조들이 하사받은 땅이 있던 시도 (矢島)로 피난을 갔다. 아버님과 고모부 그리고 사촌형을 포함한 남자 어른들은 우리를 내려놓고는 막바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피난이라고는 하지만 쌀거리와 밀가루 등 한 배 가득히 먹을거리를 준비해 간데다가 우리 증조 할아버지께서 하사 받은 땅을 부쳐 생활하는 사람들이 지은 농산물과 건어물로 매일매일이 잔치집 같은 분위기였는데 청상과부가 되신 할머님께서 워낙 손이 큰 분이시라 우리 대가족이 기거하는 집엔 동네의 마실 온 사람들로 항상 붐비곤 했다.

그런데 인천 상륙작전에도 3일간의 포격을 피했던 우리집이 북괴 인민군 사무소 건물로 사용한 것 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북으로 퇴거를 하면서 시한폭탄을 장치해 놓았는지 건물이 파괴되면서 완전 파손이 된 쓰라림이 있는 추억이 담겨 6.25와 1.4 후퇴 그리고 피난 시절은 죽어서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골목 길’ 하면 내 마음은 언제나 설레인다. 번화가의 이층집에 살던 우리는 뒤뜰이나 골목길 같은 개념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인데 그 골목길 같은 작은 대로에서 모든 게임, 운동을 다 했고 칠순을 넘긴 이 나이에도 그때 같이 자라며 놀았던 친구들을 지금도 변함없이 계속 만나는 기쁨을 누린다. 그래서 고국을 찾는다.

금년에도, 골프 여행이나 유람선 또 유럽 여행을 마다하고 내가 태어나 나를 잘 키워주고 지금의 내가 이렇게 건재하도록 살게 해준 나의 조국을 다시 찾아 방방곡곡 돌아
볼 계획으로 벌써부터 마냥 가슴이 뿌듯하다.
아! 그리운 나의 고향, 그 거리들, 죽어도 잊지 못할 그 골목길, 그리고 나의 친구들...!

<전태원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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