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갈 수록 사람들은 다소 감상적이 되어가지만, 그것은 또한 인생에 있어서 가을은 마음을 비워야하는 영혼의 계절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난 세월의 발자취를 돌아볼 때마다, 마치 물 위를 걸어온 듯 기적의 연속인 것만 같다.
자기의 힘(理性)만 의지했다면 단 한발자국도 걸어 올 수 없었던 인생이라는 거창한 로드맵을 단지 더듬이 촉각 하나에만 의지하여 메뚜기처럼 더듬거리며 왔던 그 수많은 세월들에 그저 종교적인 경이를 느낄 따름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인생… 그 불확실한 삶을 인도해왔던 신의 섭리… 아니 그 우주의 의지는 무엇이었을까? 때로는 치열했고, 때로는 절망했으며 때로는 꿈과 맞바꾼 시간들… 하루를 인내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불안한 운명조차 감싸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나약한 인간의 숙명이지만 또한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예술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위대함이기도 하다. 어려움 속에서도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순간들… 특히 절망이 몰아쳐 올때마다, 아름다운 음악들로 순수한 편지를 쓰게 했던… 야상의 순간들은 그 중에서도 엑기스였다.
얼마 전 한국의 조성진이 쇼팽 국제 피아노콩쿨에서 우승, 한국 음악도의 기개를 세계에 과시한 바 있었다. 조성진의 연주를 (유투브 등에서) 보며 음악의 마술을 다시한번 반추하는 기회를 가져보았다.
조성진이 한국 사람이었기에 더욱 자랑스러웠고, (물론 그가 다른 민족이었다 할지라도) 한 분야에서 쇼팽 콩쿨같은 세계적인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의 달인이 된다는 것은 너무도 박수받아야 마땅할, 위대한 노력의 소산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어느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해야만 꼭 위대한 연주인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세계적인 경연무대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본인을 비롯 그를 사랑하는 모두에게 기분좋은 일이다.
조성진의, 가냘프지만 현란하게 건반 위를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면서, 언젠가 사진을 통해 보았던 쇼팽의 피아노 치는 손을 떠올리게 되었다. 다소 긴 듯하면서도 갸냘픈 쇼팽의 손가락은, 어딘가 우수에 젖은 쇼팽의 표정과 함께 때론 비극적이어야만 하는… (아니 비극적이었기에 더욱 극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었던… )예술가의 운명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예술은 나약하지만 신으로 부터 부여받은-- 예지 없이는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기에, 초인적인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작곡이든 연주든… 예술가들이 창출하는 음악의 순간들이야말로 때론 기능적인 차원의… 곡예와는 또다른 감동으로 다가 온다.
매 순간순간마다 그 얼마나 살인적인 절망과 두려움으로 예술가의 길을 걸어왔던 것일까? 그 고통들에 비하면 보상이란 어쩌면 너무도 짧은, 순간의 찬사일 뿐일이만 그것이 있었기에 또한 생을 유지할 수 있었고 몸부림 치고 꿈을 꿀 수 있었기에 우리는 더욱 예술에 깊은 감동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아름답게 소묘하는 음악으로 이번 주는 밤의 음악… 야상곡(Nocturnes)들을 산책해 봄이 어떨까? 밤을 잊은 그대에게, 한 밤의 음악 편지, 별이 빛나는 밤에… 모두 우리 뇌리에 익숙한 한밤의 라디오 프로였다.
밤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픈 시적인 정서를 안겨 준다. 이때 읽는 한 편의 문학작품, 한 줄의 시… 철인들의 수상록… 음악들은 정신없는 대낮과는 다르게 더욱 포근하고 진하게 다가온다. 밤하면 떠오르는 것이 한적한 시골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일 것이다.
황홀하게 빛나는 밤하늘은 우리를 ‘어디서 왔을까’하는 철학적인 명상보다는 우선 황홀한 시적 영감으로 충만케 한다. 그래서 야상곡이란 음악 형식이 탄생했는지 모르지만 활동적인 대낮보다는 어스름한 저녁, 밤중에 듣는 음악이야말로 특별한 사색의 맛이 있다. 쇼팽은 야상곡을 좋아하여 총 21곡을 남겼는데 야상곡으로서는 최고의 작품들로 꼽힌다.
환타지와는 다르게… 잠 못 이루는 그대에게 띄워 보내는 음악편지같고나할까. 야상곡은 작곡가 존 필드(1782- 1837)가 창시한 피아노 형식인데 쇼팽, 리스트 등이 크게 발전시켜 많은 명곡들을 남겼다. 특히 쇼팽의 작품들은 기교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2번도 유명하지만)특히 7번, 20번 등을 듣고 있으면 -밤을 잊은 그대에게— 편지라도 쓰고파 진다.
예전에 반 클라이번의 연주를 들으며 아! 했는데 이번 조성진의 연주를 들으면서 다시한번 야상곡이라는… (슈만 등이 홀딱 반했다는)피아노의 시… , 밤의 감상을 편지띄어본다.
<
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