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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칼럼] “제발 태환이를…!”

2016-05-11 (수) 김문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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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환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수영선수다. 하지만 그는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에서 도핑 양성 반응을 받았다. 400 m 금메달은 물론 다른 모든 메달도 박탈당하며 선수생활 최대 위기를 맞았다.

이후 한국은 이 걸출한 선수의 올림픽 참가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여왔다. 대한체육회는 금지약물 복용 선수에 대한 3년간 국가대표 자격 박탈 규정을 내세워 참가 불가를 선언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세계적 인재를 법으로 묶어 국민적 열망을 져 버려서는 안된다며 용서하고 기회를 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약 2주전동아수영대회에서 박태환은 그간의 마음 고생과 열악한 훈련 환경을 극복하고 좋은 기록으로 4관왕을 차지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이에 가장 감격한 사람은 그를 훈련시킨 코치다. 코치는 대한체육회 앞에서 크게 절하며“제발 태환이를 올림픽에 보내 달라”고 읍소했다.


물론 코치의 읍소는 법보다는 관용을, 원칙보다는 유연함을 보여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럴만한 가장 큰 이유는 박태환의 능력이 국민적 희망과 기쁨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만일 또 다시 올림픽 메달을 딴다면 그의 명예 회복은 물론 한국의 위상도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이후 박태환 선수 본인도 한 기자회견장에서 사죄의 절을 하며“제발 리우올림픽에보내주세요…” 라며 호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에서는 여전히 법의 공평성을 주장한다. 만일 박태환 선수가 올림픽 메달감이 아니었다면 과연 이런 주문이 호소력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갈등이 있다. 원칙을 버리자니 평등이 문제고, 평등을 따지자니 탁월한 재능과 국민적 기대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올림픽 전까지 계속 뜨거운 감자가 될 것 같다.

우리의 삶도 늘 원칙과 관용의 주문들로 가득하지 않은가? 특별히 내가 사랑하거나 가까운 사람일수록 갈등은 더 깊어진다. 그리고 현실적 이득과 맞물릴 때에도 결정은 쉽지 않다. 살다 보면 “법대로”가 항상 답일 수 없다. 그렇다고“관용” 이 항상 답도 아니다. 공소시효법은 종종 살인자를 무죄로 만들기도 한다.법의 허점이다.굶는 자에게 돈을 주었더니 술로 배를 채운다.관용의 남용이다.

주님은 우리를 법대로 처리하시지 않으셨다. 법대로 하셨다면 우린 모두 죽었다. (롬 3:23, 6:23)그렇다고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 적도 없다.무법이라면 혼돈의 삶일 것이다.(마 5:17-18) 법과 관용 양쪽 그 어느 쪽도답처럼 보이지 않을 때 어떤 결정이 최선일까?

여론 조사에 의하면 국민 10명중 7 명이 (71.9%) 박태환의 올림픽 참가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반대는 21.7 % 다.이 통계는 무엇을 말할까?실력만 있으면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일까?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상관없다는 의미일까?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 보다는 오히려 박태환 선수는 이미 실수에 대한 심판을 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의미로 보인다.게다가 운동선수의 약물복용에 대해 국제법은 18개월 징계인데 국내법은 3년이다.징계가 너무 과하다는 것이다.그러니 이제는 실수보다는 용서,정죄보다는 회복,절망보다는 소망을 원한다는 의미처럼 보인다.법과 관용 중 결정이 어려울 때는 균형이 답인 경우가 많다.그렇다면 박태환 선수는 이미 균형 선상에 있지 않은가?

모든 인간은 최고를 갈망한다.그래서 베토벤,르노와르,리오넬 메시,그리고 이순신에 열광한다.왜?인간만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때문이다.그래서 나는 “제발 태환이를…”하며 읍소하는 코치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올 여름 브라질 리오의 수영장에서 승부를 떠나 상대적으로 작은 한 동양선수가거구의 서구 선수들과 경쟁하는 장면을 보고싶다.그 자체가 이미 과거의 험난함을 극복하고 최고를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제발 태환이를…!”

<김문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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