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웃는 할머니’

2016-05-07 (토) 김수자 여고동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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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4월25일 벚꽃 잎이 마치 함박눈 내리듯 내리는 가운데 ‘웃는 할머니’는 87세의 귀한 삶을 마치셨다. 1912년 12형제 중에 8번째 딸로 평양에서 태어나 온가족의 사랑 속에 엄한 부모님의 교육을 받으면서 유년 시절을 보낸 후, 결혼 하신 내 부모님은 가족 중 처음으로 서울에 정착을 하시게 되었다. 아버님은 ‘병’ 자 돌림의 항렬을 따라서 자녀들의 이름을 지어 주시지 아니 하고, 훌륭하다는 작명가를 찾아가 우리들의 이름을 제각각 지어주셨다. 부모님은 우리 자손들의 희망과는 달리 40대 중반 아쉬움 속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님 생존시 어머님은 단순히 가정 일만 하셨다, 가죽 핸드백 손잡이 안에는 어머님 성함이 적혀 있었고, 집안에는 아름다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자주빛, 갈색 검정빛 갓신이 있었고, 약장이 있었으며 소독수로 늘 손을 닦고 하시어 집안은 약 냄새로 마치 병원 같은 느낌이었다

아버님 떠나시고 홀로 3명의 자녀를 앙육 하시면서 힘든 내색 전혀 안 하시고, 혹시나 아버지 없는 아이라는 눈치를 받을 까 염려하여 우리를 더욱더 정성껏 키우셨다.
6.25 사변후 참기름, 곡식 등을 팔러 다니는 아낙네들이 집을 방문하면 어머니는 늘 식사 대접을 하고, 마른 생선 종류를 한 뭉치씩 주시곤 하였다. 어머니는 어린 아이들도 극진히 사랑했다. 어머니는 젊어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웃는 할머니’로 불리셨다.


어머니는 1986년 미국에 와서도 교회 3곳에 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면서 믿음의 삶을 늘 삶의 중심에 두고 사셨다. 장례식때 담임 목사님은 “매주 제단에 감사 헌금을 올려놓으시는 분, 유일한 김기황 권사“ 라고 하셨다. 교회 주일 학교에 중고 피아노, 또 사위 교회에는 ‘의자 기증 헌금’을 제일 먼저 하여 성전에 의자가 꽉 차게 만들었다.

우리 집안의 첫 손녀, 어머님의 증손녀 백일잔치, 부활주일 예배를 마치고 식사 후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 후 우리 내외는 성지 순례를 떠났다. 며칠을 갈릴리에서 보내고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아침에 성지 순례중 11시 쯤, 그 높고 밝은 햇살, 환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일행이 힘차게 감격하여 부르며 높은 하늘을 한없이 쳐다보았다.

오후에 호텔에 도착해서 메시지가 있어 확인해 보니 할머니가 아침 새벽에 세상을 떠나셨단다. 새벽기도에 가시기 위해 목욕을 하시다가 따뜻한 물속에서 고요히 숨을 거두시고 하늘나라로 가신 것이다. 어머니는 파인 론 Normandee Garden에 홀로 안장 되셨다. 우리는 분홍 벚꽃 잎이 무수히 흩날리는 봄날에 우리들의 귀한 ‘웃는 할머니’에게 모두 “안녕, 좋은 곳에 편안히 계세요“ 하며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김수자 여고동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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