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색종이로 꽃송이를 오려내고 초록 색종이로 기다란 리본을 2개를 잘라 꽃송이에 붙인 다음 한쪽 리본엔 ‘어머니 날’ 그리고 다른 한쪽 리본엔 ‘고맙습니다’라고 정성껏 적었다. 국민학교 1학년 때 난생 처음으로 만든 ‘어머니 날’ 종이 카네이션이다.
선생님께서 나눠주신 옷핀을 받아 학교가 파하자마자 엄마 가슴에 달아 드리려고 카네이션을 한 손에 꼭 쥐고 달음박질해서 집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그 카네이션은 엄마가 아닌 할머니 가슴에 달려졌고 엄마의 권유로 큰엄마, 친정나들이 오신 큰고모, 또 어린 아들만 둘 있는 작은엄마 카네이션까지 만드느라 정작 엄마의 카네이션은 자투리 종이로 만들어진 어색한 종이꽃이 되었다. 울상이 되어있는 나에게 엄마는 연신 괜찮다고, 예쁘다고 하셨지만 그마저도 한 시간 남짓 엄마의 가슴에 달려있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날 나는 어머니날은 엄마에게 그다지 특별한 날이 아닌 그저 어른들 눈치 보는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1973년 박정희대통령 때 소외감 느낄 아버지들을 생각해서 인지 어머니날은 어버이 날로 바뀌었고 그 후론 어머니들의 애틋한 사랑과 희생을 기억할 수 있는 특별한 날보단 외식 한 끼나 염치없는 봉투 하나로 대충 때울 수 있는 간편한 날로 전락해 버렸다.
나도 이젠 카드 정도는 준비할 수 있는 나이의 아들로부터 “감사 합니다” 정도의 인사치레는 받을 때가 되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잘 길들이지 않으면 나이 먹어서 찬밥 신세 면치 못할 것이라는 친구들의 충고로 내 생일이나 어머니날이 다가오면 아들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암암리에 다가오는 특별한 날을 상기 시켜주었다. 그러면 정말로 엎드려 절 받기로 마지못해 준비한 선물과 투박하게 적은 카드를 받으며 이번 한해도 아들 길들이는데 성공했다는 만족감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 했었다.
작년에 옷장 구석에 박혀 있던 먼지가 뽀얗게 쌓인 상자 안에서 아들이 유치원 때 만들었던 종이 카네이션을 찾았다. 그 카네이션을 받았을 때의 기쁨을 회상하며 문뜩 방에서 TV를 보고 계신 엄마를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전 그 때의 엄마가 이해되었다. 엄마는 엄마이기 전에 며느리였고 올케였고 동서였던 것이다. 당신의 ‘어머니’라는 위치보다 그분들의 ‘어머니’ 위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 더 시급했고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작 엄마에게 어머니날은 시어머니의 어머니날, 큰 올케의 어머니날, 동서의 어머니날이었다. 대접을 받기 보다는 대접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날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올해도 어머니날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아들 옆구리 찔러야 하는 일과 더불어 엄마에게 무슨 선물을 해 드려야 하나 하는 부담감으로 가슴이 조급하기만 하다. “도대체 누가 이런 날을 만들어 피곤하게 하는 거야?”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을라치면 매년 치러야 하는 이 반복의 행사가 짜증스럽고 귀찮게만 느껴진다.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다 귀찮고 그저 하루 동안만 누구의 엄마도, 누구의 며느리도, 누구의 딸도 아닌 나 자신으로 보내고 싶다는 생각만이 굴뚝같다. 그러다가 점심을 준비하신다고 주방으로 향하는 구부정한 뒷모습의 엄마를 본다. 그때는 누군가의 며느리여서 그랬겠지만 이젠 엄마의 엄마, 할머니가 되어서도 나이 어린 엄마를 위해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신다.
“엄마, 이젠 다 내려놓고 엄마 자신을 위해서 쉬세요!”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평생 동안 보호막이었던 엄마품의 울타리가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 반, 나 혼자서 독립적인 엄마로 설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반이다.
올해는 다시 국민학교 1학년생으로 돌아가 이제는 누구의 며느리도, 누구의 올케도, 누구의 동서도 아닌 그냥 온전한 내 엄마에게 종이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싶다.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젠 정말로 엄마의 어머니날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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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경 강사/에디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