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의 북한을 생각한다

2016-04-30 (토) 윤지윤 교육가
크게 작게

▶ 뉴저지 자문위원 글마당

암담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라도 변화된 내일을 설계, 구축하는 것은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 개인적인 인간의 힘이다. 인디라 간디와 에이브러햄 링컨,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그랬으며, 특히 넬슨 만델라는 고통과 핍박의 늪에서도 자유와 삶의 기쁨을 누렸고 용서와 화해의 꽃을 피움으로서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다.

필자는 20대에 도미하여 약 반세기 동안 정체불명의 사이비 미국시민 노릇하며 열등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이제는 그런 시절도 졸업하고, 내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며, 내가 왜 사는가, 누구 인가를 사회적 제약이나 조간 없이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나의 정체, 근원, 성분은 한국, 한반도, 어릴 적의 환경과 경험을 나눈 사람들과 밀착돼 있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것은 내가 50년간 살아온 미국의 딸이라기보다는, 20여 년간 잔뼈를 굵었던 한국의 소산 이라는 인식이었다. 논리가 아닌 감정으로 내가 그 땅에 속해 있음을 배웠다.
한국 하면, 두개의 고향이 떠오른다. 내가 자라고 기억하는 남쪽. 다른 하나는 기억엔 없으나 그곳에서 태어났고 동화와 신화의 고향, 금강산이 자리 잡은 고성 땅. 이 이북 땅에는 이름도 잊혀진 4촌과 6촌, 그들의 자손들이 어디선가 살고 있다. 자유와 존엄성을 박탈당한 채 배고픈 하루를 견디며 그들은 연명해 가고 있을 것이다. 만나도 알아 볼길 없을 것이지만 지도자 김정은 밑에서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다 우리 사촌 육촌이 아니겠는가.


공산당의 야간추적을 받고 남하한 식구 중 유독 내 부모님은 강원도 38선 바로 밑 해변 가에서 평생 떠나지 않고 살았다. 그들은 북녘 하늘만 쳐다보며, ‘수복’의 날을 기다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덕분에 나는 방학 때마다 아름다운 동해안의 해안선과 연결된 설악산, 오대산, 대관령 등에 접하며, 오래 기다리는 우리의 본거지, 금강산의 안팎을 꿈꾸며 살아왔다. 70년이란 세월이 왔다가 갔다. 세월의 정체가 뭐라 했던가. ‘일장춘몽’이라 했거늘, 삶이 순간에만 있는 것이라면 지금이 다 이고, 영원은 허사란 말인가.

못나고 처량한 김정은 집단의 작은 존재로서 이 무서운 세상의 질책 속에도 존속 할 수 있었던 힘은 그들의 깡패성에 있었다. ‘벼랑 걷기’란 그들의 으름장이자 무기이다. 김정은 일당은 최악의 경우 ‘이판사판’으로, 자신과 더불어 무고한 많은 인류를 깊은 파괴의 행각으로 휘몰아 갈 준비가 돼 있다. 그들을 벼랑에서 내려오게 하는 길이란 무력이 아니다. 방법은 그에게 명분의 출구를 열어 주는데서 시작된다.

우리는 위력과 절제를 갖춘 어른인 반면, 김정은은 폭탄을 장난감으로 겁 없이 휘둘러대는 네 살짜리 정신박약아이기 때문이다. 그 어린아이의 손에서 폭탄을 뺏는 작업은 무력으로서가 아니라 사탕을 던져 줌으로써 가능하다.

전근대적 냉전사상의 유물, 녹슬은 이데올로기에 입각된 한미 합동군사훈련에 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이 끔찍이도 비싸고 공포조성적인 행사의 저변에 깔린 철학과 미흡한 세계관은 21세기 인류 공존의 관점에서 재검토 할 때가 왔다고 보인다.

나 개인의 입지로서, 강원도 설악산과 금강산이 보이는 동해안의 어촌에서 주름진 얼굴들과 멍석 펴고 대담하는 생의 마지막 10년의 이미지를 애수와 연민에 실어 보내 본다.

<윤지윤 교육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