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를 행으로 알고 살아가는 삶!

2016-04-30 (토)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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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생을 살면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다. 어떻게 평생을 고생과 불행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평생행복한 사람은 이 보다 더 좋은 축복은 없으리. 반면에 평생을 고생의 연속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이 보다 더 큰 불행도 없겠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극복할 수는 있으리라.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 문둥이들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전라도 길.” 나병환자였던 시인 한하운의 시 <전라도 길―소록도로 가는 길에>다.

1949년에 발표한 시로, 시에서 한하운은 나병을 앓고 있는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문둥이 시인, 한하운. 본명은 태영(泰永)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1975년 50대 중반의 생을 살다 간 그는 평생을 천형 같은 나병과 싸우다 갔다.
그는 <한하운 시초> <보리피리> <나의 슬픈 반생기> <황톳길>등의 시집과 자작시 해설집을 남겼다. 하루 밤 자고 나면 손가락 하나, 또 하루 밤 자고 나면 발가락 하나가 떨어져 나간다는 한센병. 반평생을 이 병과 싸우다 간 한하운 시인이었다. 이런 생도 있는데 병 없이 살아가는 정상인이라면 얼마나 행복한 삶이겠는가.


시인이 찾았던 소록도(小鹿島)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에 있다. 1910년 선교사에 의해 요양원이 설립된 후 일제 때엔 조선총독부가 소록도자혜병원으로 바꾸어 전국에 있는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 수용했던 곳이다. 지금은 섬 전체가 국립소록도병원으로 지정돼 일반 주민은 거주하지 않고 한센병과 관계있는 사람들만 거주한다.

27세와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소록도로 들어가 한센병환자의 친구로 살아온 두 수녀가 있다. 마리안느 수퇴거 수녀와 마가렛 피사렉 수녀다. 1962년, 저주받은 땅이라 불렸던 소록도에 발을 디딘 두 수녀는 나환자와 살을 맞대며 43년간 함께 밥을 지어먹다, 나이 들어 2005년도에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그 중 마리안느 수녀가 11년 만에 소록도를 다시 찾았다. 지난 4월26일 기자들과 만난 82세의 마리안느 수녀는 소록도에서 죽으려 했는데 2003년 대장암에 걸렸고 세 번 수술을 받아 주위에 부담을 주기 싫어 고향으로 떠났다며 소록도 생활에서 치료한 환자들이 상태가 좋아져 집으로 돌아갈 때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한다.

또 한 수녀인 81세의 마가렛 피사렉 수녀는 몸이 불편하여 다시 소록도를 찾지 못했다. 수녀 대신 할매로 불러주길 바랐던 두 할매 천사들이 베푼 사랑은 기적을 낳기도 했다. 소록도 영아원에서 자란 한센병 환자의 자녀들 중 4명이나 사제가 나왔다. 두 수녀는 환자 자녀들의 생일을 축하해 주면서 탄생은 저주가 아니라고 아이들에게 삶에의 용기를 주었던 거다.

지금은 가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길을 가야겠다는 목적을 세워주는 한 신부가 있다. 문둥이의 성자로 불리는 데미안 신부다. 그는 1873년, 33세의 나이로 소록도가 아닌 몰로카이 섬으로 들어가 나환자들과 같이 살다 그도 문둥병에 걸려 죽는다. 16년 동안 환자들과 동거 동락했던 데미안 신부. 그는 희생을 자초했다.

아마, 그것이 행복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하운. 자신의 불행을 시(詩)란 예술로 변화시켜 불행의 삶을 그 안에서 극복했다. 두 수녀들. 한센병환자의 자녀에게 태어남은 저주가 아니란 것을 일깨워 준다. 데미안신부. 희생이 행복임을 보여주었다. 평생 행복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 고(苦)를 행(幸)으로 알고 살아가는 삶에 있질 않을까.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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