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칡과 등나무!’

2016-04-18 (월)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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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갈등의 연속이다. 사람이 사는 공동체 안에는 늘 갈등이 있다. 갈등 없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살다보면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그러니 크고 작은 갈등이 파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학교, 직장, 사회생활이 그렇다. 바늘과 실인 부부사이에도 갈등은 피할 수 없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녀들과도 마찬가지다.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 갈등인 것이다.

갈등은 한자어다. 갈등(葛藤)은 칡(葛)과 등나무(藤)라는 뜻이다. 칡과 등나무는 무언가를 감아 오르고 퍼지는 식물이다. 왜, 이 두 개의 식물은 충돌, 불일치, 마찰, 알력 등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게 됐을까? 그 이유는 두 나무에 숨어 있는 비밀 속에 담겨있다.

갈등의 어원은 칡과 등나무가 서로 반대방향으로 얽히어 자라는 모양을 말한다. 칡은 다른 식물을 왼쪽으로 감아나간다. 등나무는 그와 반대다. 다른 식물을 오른쪽으로 감아나간다. 다시 말해 등나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자라고, 칡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자란다, 어쩌다 이 두 식물이 한 자리에서 서로 꼬이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그러면서 서로 자라긴 하는 모양이다. 이처럼 둘 다 뭔가를 휘감아 오르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결국 두 식물이 비슷해 보여도 내심 서로 반목을 하고 있는 셈이다.

갈등이란 단어는 감는 식물과 감기는 식물사이의 관계일 수도 있다. 감는 속성을 지닌 칡이나 등나무는 감아야 할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가고 싶은 곳으로 뻗어 갈 수 있다. 하지만 감기는 대상은 죽을 맛이다. 몸을 내주고 햇빛을 빼앗기며 희생을 강요당한다. 그러다보니 대립과 마찰이 발생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살면서 갈등은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모든 사람의 성격과 행동은 제각각이다. 각인각색이 함께 어울려 살다보니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기에 갈등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갈등을 피해가기 보다는 풀어가는 지혜가 더 중요한 이유다.

어차피 갈등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주대하고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갈등은 “무시하고 그냥 피해버리자. 언젠가는 사라지겠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내버려두고 무시한다고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분노만 키울 뿐이다.

스트레스도 마찬가지다. 스트레스는 처리되지 않은 갈등이다. 그래서 풀지 않으면 하루 종일 귀찮게 한다. 매일매일 괴롭히도록 내버려둔다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더 쌓이기 마련이다. 때문에 갈등은 빨리 해결해야 한다. 절대로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갈등이 깊어지면 원수지간이 될 수도 있다. 성경에는 ‘원수를 사랑하라’, ‘남을 용서하라, 그러면 너희들도 용서받은 것이다‘라는 구절들이 있다. 노자 도덕경도 ’보원이덕(報怨以德-원한을 덕으로 갚아라!)‘이라고 이른다. 그러나 용서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용서하기란 어려운 일일 뿐이다.

한인사회에도 수많은 갈등이 존재한다. 요즘 뉴욕한인회가 그렇다. 거짓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갈등의 몸살을 앓고 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다. 최소한 ‘잘못’을 저지른 상대가 먼저 스스로 반성하고 용서를 구할 때라야 용서도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했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떳떳하다는데 어찌하오리까? 여하튼, 한인사회가 또 다시 뉴욕한인회의 ‘돈 문제’로 이러쿵저러쿵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참으로 ‘진리’가 ‘거짓’이나 ‘오류’를 용서해야하느냐는 간단치 않은 문제다.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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