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릇

2016-04-0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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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 자문위원 글바당

▶ 정유경(강사/ 에디슨)

식탁에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사발, 대접, 김치나 나물을 담는 보세기, 오늘의 특식을 담은 커다랗고 넙적한 접시, 젓갈용 종지 등등. 밥상을 차리다 말고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과연 우리 아이는 어떤 그릇쯤 될까를 생각해 본다.

가장 부담 없이 많이 쓰이는 사발이나 대접일까? 맛깔스러운 김치나 나물을 담는 보세기일까? 큼직하고 먹음직스럽게 특식을 담아내는 커다란 접시? 아님 짭짤한 젓갈을 담는 단아한 종지? 아니, 어쩌면 한해 몇 번만 등장하는 듬직한 냉면사발이나 떡국 대접은 아닐까? 이 그릇 저 그릇을 헤아려보다 눈이 머문 곳은 하얀 사발이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가장 필요한 그릇.

늦은 나이에 선물로 받은 우리아이는 우리부부뿐만 아니라 양가 조부모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태어났다. 그래서 이 아이만큼은 평범하고 흔한 공기나 대접이 아닌 적어도 냉면사발, 그것도 장인의 손으로 빚어낸 품위와 격조를 갖춘 사기 냉면사발쯤이라고 자부했다. 어느 부모나 그렇듯이 어린 아이가 특이한 말이나 행동을 할 때면 이 아이는 천재 아니면 영재일 것이라는 허황된 자가진단을 내렸다.


그것이 단순한 우연의 소산이거나 아니면 호기심이 많은 어린 나이에 무심코 해대는 행동들임에도 불구하고 내 아이가 최고이고 특별하다는 맹신에서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콩깍지도 그런 콩깍지가 없지만, 나는 그 그릇에 정성스레 물을 담기 시작했다. 타고난 장점을 조금이라도 잃을까봐 일찌감치 넘치도록 채우기 시작했다.
아이는 중학교 졸업 때까지 그런대로 잘 따라 주었고 원하는 특목고에도 진학했다.

자랑스럽고 대견한 마음에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 부부는 컴퓨터와 핸드폰을 사 주었고, 아이는 학교에서 수업교재용으로 아이패드까지 받게 되었다. 특별한 우리 아이는 적어도 자기 관리를 잘하며 정보화 시대를 대표하는 최첨단 기기들을 통해 혼자 힘으로도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의 느낌표였고 장마보다 지리한 갈등의 발단일 뿐이었다.
밤늦게까지 아이의 방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우리아이가 눈에 불을 켜고 수업준비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연상해 본다.

하지만 조심스레 노크를 하고 열어 본 문틈 사이의 광경은 아직 열어보지도 않은 채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는 책가방, 머리에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연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자신도 모르는 대상을 향해 총알을 날리고 있는 아이의 커다란 등짝이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고 자고 있을 다른 식구들의 존재도 잊은 채 소리를 꽥 지르고 만다. “도대체 네가 뭐가 되려고 그러냐!” “정신 차려라!” “너를 위해 고생하는 아빠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다음날 아침이면 분명 후회 할 말들을 마구 퍼부으며 머릿속에서는 이미 컴퓨터며 스마트폰 아이패드를 변기 속에 쳐 박아 버린다. 아니면, 컴퓨터를 통째로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 쳐 산산조각 내버리거나 망치로 스마트폰을 내리쳐 장렬한 최후를 맞게 하는 생각들이 번갯불처럼 지나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주머니 사정에 빠꼼한 이성이 나를 강렬하게 말린다.

‘내가 저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데....’ 밤잠을 설치다 한국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해 푸념이라도 늘어놓을라치면 남편은 아주 짤막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한마디 한다. “여보, 우리아이는 지극히 평범한 아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위로는커녕 매정한 남편의 말에 화가 나서이기도 하지만, 그건 사실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우리 아이는 아침에 가방 매고 학교 갔다 오후에 돌아오면 끼적끼적 숙제 하는 척하고, 때 되면 대충 시험 준비하고 밤새 친구들이랑 채팅하며 컴퓨터 게임으로 머리를 식힌다. 아직은 어떤 한 분야에서 특출 나지도 않고 그릇으로 치자면 평범해 보이는 공기 아니면 대접인 셈이다. 그래도 가장 유용하고 편하게 많이 쓰이는 그릇이 되기를, 그래서 이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그릇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마음 정리를 해가고 있는 참이다.

식탁 앞에 자리잡고 앉아있는 아이에게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너는 네가 어떤 그릇인 것 같니?” “뚝배기!” 아이는 겸연쩍은지 된장찌개에 숟가락을 담갔다. 왜냐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선문답 같은 대답이지만 아이는 내가 그려온 대접도, 냉면사발도 아니었다.

내가 오지도 않은 미래에 살 아이를 내가 살아온 과거의 잣대로 너무 일찍 규정지으려 한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내일은 한번 그 동안 아끼고 아껴뒀던 본차이나를 꺼내 보아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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