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피카소와 제주 4.3 학살

2016-04-02 (토) 김은주(뉴욕시 공립학교 과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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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4월26일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나치 독일의 콘도르 비행단이 무차별 폭격을 감행, 평온하던 이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되고, 민간인 1,500여명이 학살되었다.

당시 스페인은 식민지 북아프리카 주둔군의 프랑코 장군이 지휘 하는 국가주의자들과 공화파 간의 내란이 진행 중이었다. 이 내전은 국가주의자인 프랑코 장군을 지지하는 국내의 가톨릭교회, 군부 세력, 지주, 자본가 등과 독일 나치와 이태리의 파시스트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고, 이에 대항하는 공화파는 국내적으로는 도시 노동자, 농민, 교육 받은 중산층이, 그리고 국외에서는 유럽의 주요 국가와 미국의 연합군인 국제여단과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사실 나치 독일의 게르니카 폭격은 표면적으로는 프랑코 장군에 대한 지원이었으나 군사기지도, 주요 도시도 아닌 게르니카에 대한 폭격의 실제 목적은 바로 독일 나치가 자신들의 비행기와 폭탄에 대한 성능테스트를 위해 감행한 것이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비극이었다.


이 사건은 추상파 장르를 연 화가 피카소의 분노를 일으켜, 그는 예술가로서 인문주의의 양심을 대변하는 양심적이고 민중을 사랑하는 세계적인 존경심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한국전 중 미군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그린 그의 그림은 (Massacre in Korea) 한 때 한국에서 선보이는 것조차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필자가 뒤늦게 알고 저으기 놀란 적이 있다.

게르니카 사건 후 11년 만에 지구의 반대편 동양의 작은 섬 제주도에서 발생한 비극적 4.3학살은 그 규모에서나 동기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대규모가 큰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열망하는 민간인에 대한 조직적 학살작전이었다.

피로 얼룩진 ‘격동’의 현대사에서 빼어 놓을 수 없었던 이 사건의 전조는 일제의 앞잡이로서 동포의 피를 빨던 조선인출신 일본 경찰과 일본군 조선병졸들은 남북합작을 원하는 민족세력이 득세하면 자신들의 처벌이 불가피할 것을 예견한 친일파가 1947년부터 사설 청년단체를 만들어 민족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조직적으로 백색테러를 감행하면서 나타났다.

제주도의 대학살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민족세력에 대한 위협의 신호였다. 4.3사건 진상 규명에 힘써 온 허삼수 교수와 이도영 박사 등에 의하면 미군정의 통제를 받은 한국군과 경찰에 의해 무참하게 피살된 양민이 30만 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최근 남한에서 또 다시 시대착오적인 ‘4.3 학살과 비슷한 것들를 선동하는 소위 ‘우익 부흥회’와 이에 대한 사이비 극우 언론의 지원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상징하는 마지막 보루인 `개성공단'까지 폐쇄와 거의 맞물려 미군의 대규모 전쟁연습이 진행되고 있고 정세가 전면적으로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한편 ‘종북’ 탄압의 매카시 선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바로 이 때야 말로 또다시 맞는 제주4.3 학살의 비극에 대한 우리의 경각심이 한층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반민족 증오심 고취는 바로 제2의 4.3 학살을 부추기는 경거망동이라는 사실을 통찰해야 할 것 같다.

<김은주(뉴욕시 공립학교 과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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