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활을 믿는 믿음!

2016-03-26 (토)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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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는 걸 보면 너무 신기하다. 알을 깨고 나오는 건 병아리뿐만 아니라 모든 조류에 해당한다. 알을 부시고 알의 안에서부터 세상 밖으로 나오는 새들은 알을 깨고 나옴과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맞이한다. 새로운 세상이란 죽음같이 고요했던 알 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이자 부활이다.

교회는 부활주일이 되면 부화되기 전의 닭의 알인 계란을 나누어준다. 의미는, 예수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돌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알 속에서 그걸 부시고 나오는 병아리라는 새로운 생명에의 변화를 부활에 비유한 거다. 교회에선 알록달록 예쁘게 그림까지 그려서 어린아이들에게 나누어준다.

신앙이란 확신인데, 그 확신이 과학적, 이성적으로 맞지 않는 비합리적인 것이라 해도 그것을 믿을 때 사용되는 용어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신앙과 믿음은 기차의 두 철로처럼 평행선을 그으며 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두 길이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로 도저히 과학적으로 믿을 수 없는 현상을 믿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성경에 의하면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했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흘 만에 살아난 예수는 제자들에게 못과 창에 찍혀진 손과 몸을 보여주며 함께 생선을 드시는 등 그가 살아 돌아왔음을 몸소 보여준다.

예수의 부활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영혼만의 부활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이 함께 다시 살아나는 몸과 영혼의 부활이다. 종교에서 많이 다루어지는 영혼의 세계는 전생퇴행 등의 과학적 최면요법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또 전생에 살았다가 현생의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현상도 초심리과학을 통해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의 예수의 부활은 전생퇴행이나 초심리과학 등에서 밝혀지고 있는 그런 유의 사례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부활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육체를 지닌 체 살아나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주며 믿음을 심어주게 한 확신에 있다. 확신은 신앙인데, 여기서 기독교의 신앙이 전례 된다.

신앙은,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게 낫지를 않을까. 무언가를 믿고 사는 게 험준한 세상을 살아가는,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현 세상에서 그래도 도움이 되질 않을까. 이 세상에 무신론자는 없다. 무신론(無神論)을 논할 때 이미 신(神)은 전제돼 들어가기에 그렇다. 우주와 인간과 모든 생명체가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어느 친구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있다며 우주의 기원을 말한다. 우주의 존재가 저절로 있질 않고 누군가의 설계대로 생긴 것이라면, 예수의 부활은, 그 설계자에 의하면, 너무나 쉬운 일이 아니겠냐는 거다. 우주, 즉 빅뱅이전에 존재한 조물주가 있다면 세상에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냐는 설명이다.

내일은 부활절이다. 부활주일, 교인들은 교회에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난 예수의 부활을 기뻐하며 찬송을 부르게 된다. 그런데 벨기에의 브뤼셀에선 이슬람국가(IS) 테러요원들이 폭탄을 터뜨려 수십 명의 시민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다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온 세계가 기쁨이 아닌 슬픔으로 부활절을 맞게 되나 보다.

세상에 편만한 악의 근원들. 부활의 기운으로 막을 수는 없을까. 친구는 말한다. 예수를 죽음과 사망에서 건져 낸 하나님이시라면 이 세상이 테러와 전쟁과 가난과 기근과 악이 존재하지 못하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변화시켜 줄 수 있을 거라고. 그래 믿어야겠지, 그게 신앙이니까. 그리고 그게 부활을 믿는 믿음이 아닐까!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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