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몽블랑(Mont Blanc) 만년필

2016-03-26 (토) 전태원 (자유기고가/ 하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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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자문위원 글마당

신문사에 글을 기고한지가 10년이 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글을 펜으로 썼던 게 아니라는 거다. 80년대 초부터 모든 회사 업무에 컴퓨터가 도입되면서부터 펜대를 잡는 시간보다 자판을 치는 일이 더 많아지다 보니 펜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물론 영문으로만 컴을 사용했지만 차차 한글에도 익숙해지고 한글을 쓰는데도 자판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한국학교는 물론, 교회나 사회단체도 한글을 쓸 수밖에 없는 웹사이트가 개설되면서 더욱이 펜과 멀어지게 된 것이다.

옛날 어르신네 세대들이 먹을 갈고 붓을 이용해서 글을 썼을 때를 생각하면 정말 상상도 못했던 변화가 온 것이다. 태어나서 40년 이상을 연필과 펜을 사용하던 시대에 적응하며 성장했던 우리들로서는 혁명이 아닐 수 없다.


인류 최대 발명품은 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웅장한 건축물은 물론 전기, 컴퓨터 등 수많은 발명품들이 있지만 글자가 없었다면 과연 이 모든 것이 탄생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일 년 전쯤 친구로부터 의외로 만년필을 선물로 받았다. 선물을 준비한 내외는 뉴욕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피로연 사회를 맡아 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근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때 고마움을 잊지 않고 인사를 하는 마음씨에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주지도 멀리 떨어졌고 취미 생활도, 교회도 다르다보니 서로 연락이 두절된 상태로 지냈는데 신문에 기고한 글을 읽은 인연으로 다시 반가운 만남을 이어가게 된 막역한 친구였다.

놀랍게도 몽블랑 만년필인데 가격이 460달러, 세금까지 계산하면 500달러대이다. 정성을 다해서 선물을 준비한 분의 성의를 십분 고려한다면 사용을 못하고 컴퓨터 책상 바로 옆 구석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처량한 신세가 돼있는 꼴이 안스러울 뿐이다.

어느덧 펜을 잡고 글을 쓰는 데는 문제가 있는 거였다. 펜보다는 자판을 두드리는데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스마트폰 터치가 더 자연스러워질 정도의 삶이 현대를 사는 우리를 변형시킨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서 생각도, 착상도 컴 앞에 앉아 화면을 바라봐야만 떠오르고 키보드를 때려야만 글이 되는 희얀한 습관에 매이게 된 것이다.

수십 년이라는 세월동안 연필과 펜을 써서 생각과 뜻을 글로 옮겨왔던 습관이 달라진 건 아마도 자연스런 현상일지도 모른다. 이런 변화된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카드를 주고받는 수고를 없애는 데도 일익을 담당했고 연하장을 직접 펜으로 써서 발송한지도 꽤 오래 된 것이 사실이다.

인간이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하지만 정말 요상, 간사할 정도로 이젠 펜을 잡고는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얘기다. 컴퓨터 책상에 앉아야만 시상(詩想)도 영감(靈感)도 떠오른다고 한다면 오만방자함의 극치를 달린다고 책망을 들을까 염려된다.

평생을 연필과 펜을 사용했던 우리 세대와는 달리 이젠 자판을 두드리며 순식간에 뚝딱 글을 작성, 저장하고는 언제든 쉽게 열어보고 수정도 하고 전송도 하는 편리한 시대가 도래한 세상이니 말이다. 분명코 좋은 글을 많이 쓰라고 준 선물일진데, 이 글도 자판대에 손을 놀려 찍어대고 있으니 만년필에 대한 옛날 애정은 그저 한낱 추억일 뿐, 몽블랑에 대한 예의도 아닐 지고…

그 어느 명품일지라도, 명감이 명장을 만나야 빛을 발하듯이 제대로 된 명인을 만났어야 그 진가를 살릴 텐데 단연코 이 몽블랑 만년필이야 말로 주인을 잘못 만나 것 같아 안쓰러울 뿐이다.

<전태원 (자유기고가/ 하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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