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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칼럼] 부활을 바라보며

2016-03-09 (수) 김문철 목사/천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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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신학교 설교학 소장 스캇 목사가 전해주는 예화다.어느 날 워싱턴 D.C의 몹시도 분주한 한 지하철 정거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 남자가 자기 앞에 있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고는 지나가는 행인들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몇 명의 어린 아이들이 멈추어 서서 쳐다보지만 곧 부모에 이끌려 사라진다. 또 대 여섯명의 사람들이 약 1-2분 정도 쳐다보지만 전철을 타기 위해 사라진다. 그렇게 쳐다보면서 연주를 듣던 몇 명이 바이올린 케이스에 돈을 던져 넣는다. 그날 거리의 음악가가 연주하면서 모은 돈은 총 $ 32.17 이었다.

그 연주자는그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여호수아 벨이었다. 바로 3주 전 벨은 청중들로 가득 찬 보스톤의 한 연주 장에서 연주했는데 입장료는 좌석당 100불이었다. (가장 싼 좌석 가격도 벨이 그날 전철역에서 거둔 액수보다는 비쌌다) 벨이 그 날 자신의 이름을 알려지 않은 체 행인들 앞에서 연주한 곡은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는 가장 난해하고 복잡한 곡이었다. 물론 그는 그 어려운 곡을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로 연주했다. 게다가 그날 벨이 사용한 바이올린은 삼백 오십만 불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 였다.

그런데 그날 전철 역 앞에서의 벨의 연주는 워싱턴 포스트지가 과연 이 놀라운 연주를 사람들이 알아차릴지를 알아보기 위해 비밀리에 고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몇몇 어린이들을 제외하곤 그 놀라운 연주를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우리의 삶에도 종종 놀라운 일들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알아 차리지 못할 때가 있지 않을까?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유대인들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 2장)예루살렘 성전은 당대 최고의 건축물이었다. 46년에 걸쳐 지었으니 그 웅장하고 화려함은 상상을 초월한다.유대인들은 물론 모든 방문객들은 성전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는다.그런데 주님이 그 화려한 성전 안에서의 불의를 보시곤 분노하신다.그러자 유대인들이“무슨 권리로 이리 소란인가?이리 해도 될만한 남다름(기적)을 보여달라?”며 시비를 건다.

그러자 예수께서“이 성전을 헐면 3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신다.유대인들은 예수를 미쳤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예수의 말씀은 허언이 아니다.성전은 예수 자신의 몸을 의미하고 3일은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실제로 주님은 죽으신 뒤 3일만에 부활하신다.돌과 나무로 지은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주님이 참된 성전 임을 부활로 입증하신 것이다.하지만 유대인들은 화려한 성전(건물) 안에 도취해 그 성전이 가리키는 진짜 성전이신 주님을 몰라본다.오히려 미쳤다고 생각한다.그래서 조롱하고 배척한다.

과거 스페인 선원들이 고대하던 아마존 상류로 진입했으나 강 폭이 워낙 넓어 여전히 대서양이라고 믿고 있었던 예가 있다.스페인 선원들은 짠 바닷물 위에 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심한 갈증에도 불구하고 물을 떠 마시지 않아서 죽었다.풍부한 생수의 원천 한가운데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 차리지 못해 목말라 죽어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서 있는 진짜 성전이신 예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얼마나 비교가 되는가?화려함과 누추함.웅장함과 왜소함.사람들은 그래서 속는다.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이 때론 우리를 영적 맹인으로 만든다.“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닌가”라는 논리가 불의를 합리화시키는 것과 비슷하다.성전 때문에 성전을 못 보게 만드는 현상이다.

주님께서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에 취해있던 이들에게 도전하신“성전을 헐라,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는 약속이 우리에게 부활의 의미로 다가온다면 복이다.주님의 부활 속에 나의 부활도 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피조세계에 부활보다 좋은 것이 있을까? 주님 고난 당하신 사순절 기간에 그 부활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믿음을 키워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김문철 목사/천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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