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레의 시민과 난민

2016-03-04 (금) 민병임 논설위원
크게 작게
프랑스 북부 도시 칼레(Calais)의 난민촌 일부가 불탔다.

열악한 환경으로 ‘정글’이라 불리는 이곳에 지난달 29일 폭동진압 경찰을 태운 차량 40여대가 속속 도착, 불도저 2대를 앞세운 철거인력들이 난민촌 남쪽 지역인 이란인 텐트를 허물기 시작했다. 경찰은 철거에 앞서 “1시간내로 지금 살고있는 텐트를 떠나라. 곧 철거가 시작된다”고 방송했다.

그러나 어딜 간단 말인가. 조국을 떠나 집도 절도 없이 임시로 머물면서 일자리가 많고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으로 가기를 학수고대하는 이들이 갈 곳은 없었다. 일부 난민들이 경찰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텐트에 불을 지르는 등 반발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해산시켰고 이날 100여개의 텐트, 판잣집을 철거했다고 한다.


칼레는 영국과 가장 가까운 프랑스 항구 도시로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고속도로 유로스타 역과 여객선 항구가 있다. 이곳 난민촌에는 북아프리카와 중동,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온 난민 4,000여명이 머물고 있다.

며칠간 난민촌 철거작업이 지속되면서 난민과 시민활동가들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경찰과 철거 인력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적극 항의했다고 한다. 지난 해 100만 명이 넘는 중동 난민을 받아들인 유럽 국가들이 곳곳에서 난민들을 거부하고 있다.

칼레의 도시명은 우리에게 낯익다. 오귀스트 로댕의 걸작 ‘칼레의 시민들’을 기억할 것이다. 죽음을 자처한 씩씩한 모습보다 죽음의 두려움에 맞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영웅이라고 여긴 로댕은 공포에 질린 극히 평범한 6인의 모습을 조각해 시대를 넘어 대중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다.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백년전쟁이 일어났고 칼레는 잉글랜드 도버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어 집중공격을 받게 된다. 1347년 칼레는 영국군에게 함락되어 영국령이 되었다. 무려 251년이나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1558년 탈환해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 칼레가 비운의 도시가 된 것은 백년전쟁이 시작된 지 10년 후다.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3세는 1346년 9월 칼레항을 포위했으나 시민들은 1년동안 저항하면서 칼레를 지켰다. 그러나 먹을 것이 떨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항복하는데 영국왕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조건을 내놓았다. 바로 칼레시민 6명의 목숨이었다.

먼저 칼레의 최상위층 부자 유스타슈 생 피에르가 나섰다. 고위관료, 법률가, 상인 등 상류층 여섯명도 목숨을 내놓겠다고 했다. 사형 집행날 단 한명이라도 빠지면 칼레시민 8,000명을 몰살하겠다는 영국 왕의 협박에 피에르는 교수대로 가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머지 6명도 영국의 요구대로 삭발을 하고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 옷을 입고 맨발인체 교수대로 향했다. 마지막 순간 영국 왕비의 간청으로 6명은 살아났다.

로댕은 이들이 교수대로 향하는 모습을 구리빛 동상으로 만들었다. 수백년 전 칼레는 스스로 희생을 자처하는 용기와 의가 넘치는 지도자를 지닌 도시였다. 프랑스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지배층의 도덕적 의무)의 기원이 되는 이야기다.


오늘날, 칼레 시민들은 오갈 데 없는 난민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불법체류자에 폭력과 비위생적 환경을 떠올리며 어서 이 도시를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위급한 상황에 처한 난민들의 처지가 자신에게 불티로 돌아올까 문을 걸어 잠그고 방관자로 있을까.

칼레 난민들은 지금, 먹을 것, 마실 것, 잠자리가 불편하고도 부족하다. 그리고 내일을 걱정한다. 칼레는 더 이상 ‘비운의 도시’가 되어서는 안된다. 역사에 ‘행운의 도시’로 불려지는 일은 과연 일어날까.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 동상이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치기 바란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1층에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 복제품이 있다. 무릇 한인사회 지도자들은 그 앞에 가서 한번 자신을 돌아보라.

<민병임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