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연필의 추억!’

2016-02-29 (월) 연창흠(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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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자존심 ‘샤프’가 몰락했다. 104년 전통의 샤프를 대만그룹이 삼켜버렸다. 샤프의 기업이름은 1915년 ‘샤프펜슬’을 대히트시키면서 새로 바뀐 것이다.

필자는 이 기사를 접하고는 어린 시절 추억이 먼저 떠올랐다. 그 당시에 그렇게 갖고 싶었던 ‘샤프펜슬’을 발명한 기업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40여년이 훨씬 지난 어린 시절엔 연필로 공부했다. 당시 연필심은 물러 뭉그러졌다. 침을 묻혀 써야 했다.
어떤 때는 너무 날카로워 공책을 찢었다. 꾹꾹 눌러 쓰면 부러지기 일쑤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깎아야했다. 수염을 깎는 면도날로 깎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 향나무 연필이 나왔다. 노란색 위에 낙타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연필심도 강했다. 글씨를 반듯하게 쓸 수 있었다. 뒤꽁무니에는 지우개도 달렸다. 그 때는 그 것이 연필 중에 짱’이었다.

등하교 때 학교 앞 문방구에 자주 들른다. 새 연필을 사서 향을 맡아본다. 집에 와 연필을 깎으며 뜻 모를 설렘을 느낀다. 숙제를 공책에 한자 한자씩 채워간다. 흰 공간이 빽빽하게 메워진다. 즐거움이자 기쁨이었다. 일기도 연필로 썼다. 반공표어, 웅변원고 그리고 글짓기 내용 역시 연필 몫이었다. 그 때 그런 것들이 연필이 주는 매력이었다.


교실에선 연필 하나면 여러 놀이를 할 수 있었다. 그 중 으뜸은 연필 따 먹기(?). 책상 위에서 손가락을 튕겨 밀어내는 방식이다. 지면 연필을 빼앗기는 규칙은 엄정하다. 몇몇 급우들이 텅텅 빈 필통 때문에 집어 들어가 혼나는 이유였다. 연필심을 서로 부딪쳐 부러뜨리기도 했다. 심이 굵고 강해 친구 것이 부러지면 기분이 통쾌했다. 그 반대면 기분이 엉망이었다.

연필은 참으로 다양하게 쓰였다. 시험 때는 소위 ‘연필 굴리기’가 그 것이다. 우선 연필 옆을 4각형으로 살짝 판다. 거기에 아라비아 숫자 1, 2, 3, 4를 적는다. 시험문제를 풀 때 숫자가 나오는 대로 답을 적어 넣는 것이다. 신통하게 맞아들어 기뻐하는 급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별무신통으로 울상을 짓는다. 공부하다 귀가 가려우면 손가락보다 연필심이 유용하게 쓰여 지기도 했다. 반에서 맘에 안 드는 친구를 놀릴 때도 역시 연필이 ‘딱’이었다. 친구 얼굴 곁에 날카로운 연필심을 갖다 대고 ‘@@야’라고 부르면 여지없이 고개를 돌린다. 어린 나이 탓에 아파하는 표정에 막상 즐거워하지 못한다. 오히려 미안함이 앞섰다. 담임이나 반 친구의 어머니한테 혼날까봐 걱정을 더 많이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흔히 다 써서 거의 못쓰게 된 짧은 연필 도막을 몽당연필이라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엔 몽당연필도 귀했다. 칼로 깎을 때마다 연필심이 길게 될까봐 조심했었다. 손에 잡기 힘들 정도가 되면 볼펜껍질에 끼워서 가지고 다녔다. 시험 볼 때나 어려운 문제를 풀 적에 일부러 손때 묻은 몽당연필을 쓰기도 했다. 그만큼 정이 들고 믿음직한 존재였다. 그런 연필로 가나다라를 배웠다. 그리고 오늘 그 덕분에 칼럼을 쓰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정도에 반 친구가 가져온 일본 ‘샤프펜슬’을 처음 접했다. 심이 따로 있었다. 연필처럼 깎지 않아도 쓸 수 있었다. 기계식 연필이라 했다. 참으로 신기하고 편리해 보였다. 그 땐 무지하게 갖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샤프펜슬은 ‘부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중학교 가서야 그나마 한국 샤프를 사용하며 위안을 삼았다.

이제는 디지털시대. 연필보다는 펜을 사용하고 자판을 두드리어 출력을 한다. 하지만 컴퓨터 자판이 아무리 빠르고, 스마트폰 터치가 아무리 편리해도 연필의 ‘생각하는 감성’과 ‘창조하는 힘’은 결코 대처하지 못한다.

아직도 필자는 취재할 때 연필을 쓴다. 세월의 흐름 속에도 고고한 매력을 지닌 채 연필은 여전히 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창흠(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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